염불에서 삼매까지/.....삼신설

삼신설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불제자 2009. 8. 27. 23:42

 

 

 

 

 

삼신설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지금도 많은 불교서적과 불교관련 명상서적에서 자성을 불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불성은 자성이라고 할 수 있

으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단지 견성을

한 후 지고한 환희와 지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선사는 진실

하지도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한 견처임을 알아야 한다.

 

견성을 해보면 알지만 그냥 환희 트인 인식의대변환을 얻는 것이며

자성광을 얻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환희와

희열 그리고 지복의 열락은 견성이나 아라한 위에서 얻

을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견성은 단순히 자각의 눈이 뚜렷하고 명료하게 확장되고 집착

에서 벗아나고 음욕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지멸되는 경지

일 뿐이다.  견성이나 아라한 위를 얻고 환희, 희열 운운하는 것은 잘

못되고 솔직하지 못한 위선적 견처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명지해야 한

다.  견성을 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하자면 큰스님 말씀대로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머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어 적조요 만고의 광명"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을 보다 선명하고 명료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인

식하고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이 견성의실제적인 의미다.  내면에서 참

성품이 깨어나 마치 진리의 빛이 탄생하는 것을 견성이라 보면 좋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의 빛, 자성광은 은백색의 빛일 뿐, 억종 찬란한

불신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달마 조사가 말씀하신 청정심과 중

생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달마 조사는 선불교에 있어서

창시자에 해당하므로 견성과 깨달음 그리고 아라한 위에 대해서는 여

실지견으로 잘 상술하고 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

하고 가르침들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

 

여하튼 달마 조사는 근본 마음 자리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여 청정

심이라고 한다.  이 청정심은 선하다 착하다는 뜻의 선심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선심과 악심은 대비를 이루어 음양의 이원론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청정심은 근본마음으로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행이 높고 고행을

많이 하고 인내를 하고 절제 및 금욕 수련을 하면 궁극적으로 내면의

근본 마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천지가 뒤집어 진다.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 말씀으

로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매우 정곡을 찌르는 정확하고 명료

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큰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거의 업연이 어는 정도 소멸되거나

지멸된다.

 

자신을 둘러싼 주객의 벽이 허물어지고 흔히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

는 세상의 개벽을 몸소 체험하는 경험이 바로 견성이다.  이

견성을 얻게 되면 자신의 살림살이를 갖게 된다.  선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면 마음이 화공과 같이 탁 트인 광대한 인식의 전환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너'라는 분리된 상과 분별심

이 다소간 사라진다.  별도의 나라고 할 만한 실재가 없다는 무

아 사상을 어는 정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허무주의로 들릴

수 있다.  실상 견성이 허무주의로 격하되고 있는데 대해서는 선사들의

잘못이 크다.  모든 것이 비어있고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만을 가르치

기 때문이다.

 

사실 견성의 자리는 바로 갓 깨달음을 얻은 자리이지 붓다를 이룬

자리는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여기서 어느 고승의 가르침을

새겨들어야 한다.  고승께서는 견성, 즉 깨달음을 고목나무에서 꽃피운

다고 비유했다.  꽃이 피는 것이 견성이다.  영적 재생이자 영혼의 부활

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견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차이를 갖는 불과는 고

목이 죽고 그곳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

운 나무가 다 자라나 완벽한 나무로 성장했을 때를 불과를 증위한 것

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사변적 견처일 뿐 견성과 불과에 대한 보다 실재적인 비

유는 실증적인 경험으로 대성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가르침을 친

견해서 들어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견성과 불과는 땅과 하늘의 차이

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 선사들이 견성을 얻으면 청정한 성품을 봄으

로써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을 알지 그 이상은 모르기 때문에 신도들이

나 선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진상이 공허하고허무

주의로 밖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극명

하게 상술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한편 견성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된다.  그리

하여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되면 과거의 업들이 어느 정도 탈각되어 나

가면서 몸에 존재했던 탐  진  치 삼독심도 어느 정도 사라져 간다.

 

이렇게 업들이 녹아 없어지고 습기가 없어져 가면서 내면에서

빛이 영롱하게 현출하게 된다.

 

명심해야 할 사항은 견성, 즉 깨달음을 통해서 억겁동안 쌓아온 습,

기, 착, 빚, 죄, 삼독심 등등을 모두 송두리째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다.  얼마간의 소멸은 있다.

 

하지만 견성을 하고 보림을 마쳐 아라한 위를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부처라고 자부하는 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오만방자한 행위임을 명각해야 한다.

 

실재로 표면적으로 인식상으로 느껴지는 모든 중생심은 탈각되어도

무의식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업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과를 증위해야만 완전한 악업, 죄, 착, 습의 소멸

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