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붓다의메시지존평

천도와 효

불제자 2011. 7. 4. 21:04

 

 

 

 

 

 

천도와 효

 

 

 

 

1) 문제의 출발

 

사실 자재 만현 큰스님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가 ‘천도재’이다. 그리고 이 속에 ‘효(孝)’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재 만현 큰스님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것을 빼놓고 문제를 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를 벗어나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것인데, 해탈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천도재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부처님 당시에도 이 문제는 수없이 언급만을 하셨고, 그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밀장(密藏)으로 숨기셨다. 자재 만현 큰스님 역시 천도재의 중요성을 언급하시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조차도 언급하시지 않는다. 분명히 이 문제를 짗고 넘어가야 현지사의 신화를 밝힐 수가 있다.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삼아 내린 결론은 이렇다.

 

수행에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것은 천도에 있다. 수억 겁동안 쌓아온 우리 영혼이 때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제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우선 그런 쓰레기를 거둬내서 영체를 맑게 한 연후에 수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장애 요소가 제거되어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이 비밀은 ‘불보살들과의 교감’을 비로소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칭명염불의 목적 또한 불보살의 가피를 받고자 하는 것 이므로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천도는 어찌되었든 간에 이 생에서 저편의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현지사 천도는 시공을 초월한 것이어서 그것이 과거일수도 있고 내세일 수도 있으며 현세일 수도 있다. 내가 정리해야 할 인연의 대상은 윤회에도 있고 윤회 밖에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음신의 세계이다. 나머지 영가들은 모두 이른바 적(籍)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적을 갖고 있지 않다. 대체로 비명횡사한 영가들로 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갈곳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산자들에게 기생하고 자 한다. 그래서 빙의(憑依)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빙의는 적(籍)이 없는 무주고혼들이 인연 따라 산 자의 몸으로 달라붙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정명(定命)하지 못한 영혼들로 윤회(輪廻)에도 들지 못하고 명부(冥府)에도 들지 못한 영가들이다. 객사나 자살, 중병 등으로 죽음 자체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무주고혼으로 남아 죽은 자의 세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함께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없고 이것을 받아주는 곳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과 현상은 언제나 괴리를 일으키게 된다. 마침내 심술은 더 고약해지고 드디어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달라붙어 식색(食色)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한편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목숨을 잃을 때의 행위를 전가시켜 “그 후손들로 하여금 객사하고 자살하고 몹쓸 병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동안 정신의학 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각도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대안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빙의를 치유한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 빙의된 자들이다. 무엇보다 죽은 자의 혼백을 불러들이는 장소나 또는 그것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색이 나지 않는다. 빙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빙의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빙의된 신의 능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신을 제압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대다수 종교에서 주신(主神)을 내세워 그 능력을 빌어 빙의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영구적인 해결책 또한 아니다. 그 때와 장소만을 피하게 하는 것이므로 틈이 생기면 다시 다가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민속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사석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특정 종교들이 거론되기 때문에 필자도 더 이상 언급을 할 수가 없다.

 

천도에서 만나는 인연은 차생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계로 부모, 형제, 조부모, 사촌의 구조로 퍼져 나아가고 모계의 인연으로는 외조부모의 인연으로 이어져간다. 이 핏줄의 인연만 따져도 엄청난 숫자의 영가가 동원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얽혀진 실타래를 푼다는 것은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하여 천문학적인 수치를 계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컴퓨터는 인간의 감정의 수치를 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식(識)에 쌓인 문제까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천도재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라도 한 평생 자신의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상의 온갖 현상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생노병사의 과정이 ‘고해(苦海)로 이름 붙여질 정도이니 결코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툭 털어 버리고 산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자기 존재 때문에 스스로 안은 문제들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적에 모두 빚으로 남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이것을 주관하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착(着)이 생기는 원인이야 자신의 존재만은 아닐터이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식 때문에 착(着)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짐 때문에 다음 생은 보장되지 못한다. 따라서 천도는 이 착을 근원에서 지워내는 작업인 셈이다. 그 작업의 어원을 ‘효(孝)’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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