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붓다의메시지존평

宣布의 意味

불제자 2010. 6. 29. 20:29

 

 

 

 

 

2. 宣布의 意味

 

 남섬부주 선남자 선여인에게 전하노라

 

 

 



불세존은
가섭과 아난이
남섬부주 대한민국 따에 왔음을
선포하노라.

영산당시
아난이 다시와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덕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

문수의 법왕자로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노리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공덕이 많은
선남자 선여인들은
이 책을 의심 말고 믿을지니라.

이번에
법왕자 자재만현이 펴낸
붓다의 메시지의 내용은
분명한 사실임을
나, 불세존은 증명하노라
불과를 이룬 붓다는
무아 속 절대세계에 여여히 계시느니라

자기 불신을 얻고
법ㆍ보ㆍ화 삼신을 구족한다는
삼신설의 법문
이 모두는 틀림이 없노라.

지옥과 천상이 있고
업보중생이 육도에 윤회생사하느니라.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해야 하느니라.

이후부터 중요하노니
음계 등 중계를 호지하면서
나 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나아가라
그래서 증득하면 성중아라한이니라.

성중이 되면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느니라.

성중들이 다시 몸을 받아와
보살이 되는 공부를 할 때에는
음계를 생명처럼 지켜
이타행하면서 대승경전을 읽고
염불선 되도록 정진하라.
부모님께 효도를 다함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야
보살의 성과를 얻어
정토에 가 나리라.

보살이 붓다 되려면
여러 생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바라밀 수행함으로써
선근보따리를 키울지니라.

불과를 증하면
무량광으로 된
자기의 불신이 생기느니
미래제가 다하도록 멸도하지 않으리라
백천삼매,
대적정삼매를 자유로이 수용해서
삼명 사지 오안 육통 그리고 지혜와 자비
복덕을 구족해 일체에 자재하느니라.
그 우주적인 능력은 무한하여
실로 불가능이란 없노라.

붓다는 빛이라
삼천대천세계에 주변하여
일체처 일체시에 아니 계신 곳 없도다.
가고 옴도 없고 머묾도 없어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도다.
백천만억 화신을 내어
중생을 교화하지만
적정삼매당처를
한걸음도 떠남이 없느니라.

재가의 신도들은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하며 자정기의하라.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하늘이나 인간의 몸을 받도록 하라.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승들은
삼보에 귀의한 승려의 본분을 잊지 말고
청정 무소유로 살도록 하라.
자신을 제어하라.
만일 음계를 범하면
분명히 무간지옥에 떨어지나니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길지니라.

        남섬부주 교주 불세존

 

 

 이 글은 자재 만현 큰스님이 불과를 이루고 붓다의 정법이란 무엇인지를 세상에 전하려고 할 적에 삼매(三昧) 속에서 그 붓다께서 친히 받아쓰게 한 추천서이다. 저자가 제목 부제로 ‘염불삼매 속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라고 밝혔듯이 저술은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기 전까지 모든 과정은 삼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삼매 또한 그 종류가 다양하여 무아(無我)의 선정(禪定)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매 속에서 붓다를 친견하는 것은 결코 대단한 것도 아니다. 붓다의 유지로 불상이 조성되지 못했던 초기시절 불탑 앞의 정진을 통해서 붓다의 현신(現身)을 경험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이 경험한 것은 화신불(化身佛)이었다.

 

 하지만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대적정삼매 속에서 붓다를 친견하였다는 것은 그 저술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와는 분명 다르다. 화신불이 아닌 진신(報身佛)을 만난 것이다. 불과를 증득하고서 붓다를 친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 입멸 후 무량광(無量光)으로 존재하시는 붓다의 보신불(報新佛)을 친견할 수 있었던 보살은 오직 사리불, 수보리, 가섭, 아난의 네 분뿐이었다. 빛(無量光)으로 이루어진 지복(至福)의 인격적인 붓다의 몸이다.

 

 이 글은 추천사라기 보다는 하나의 선포문이다. 육하원칙으로 따져보아도 어디 빈자리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텍스트이다 이 보다 더 완전하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료 가운데에 이른바 신필(神筆)이란 것은 많다. 필자도 그런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 운율등을 맞추어 쓰여진 것을 보면 모두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 속의 내용과 그 속에 흐르는 기(氣)는 다르다.

 

 이 추천사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내용과 견주어서 어디 한 점 부족함이 없고 기(氣) 또한 준엄하다. 그야말로 영산 당시의 사자후(獅子吼)를 느끼게 한다. 흔히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면 금강경(金剛經)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가 이런 비유와 다른 까닭은 붓다 자신이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기존 아난의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것과 이 저서 부제의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는 말의 강도, 또한 이미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의 ‘보고’란 한 마디는 3천 년의 군더더기를 일순에 허물어 이제 더 이상의 위경(僞經)이나 주소(註疏)의 존재를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아난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금세기의 ‘붓다의 추천사’는 ‘매우 준엄한 경고’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텍스트에서 중요한 요소 하나는 이 메시지를 받는 수신자(受信者)의 범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일부에 국한된 사람만으로 볼 것인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佛家)의 사상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으로 나누어져 있고 또한 불보살의 대발원과도 연계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범주 문제는 첨예한 논란을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일종의 선포문으로 볼 경우 귀를 가진 모든 사물이 다 해당한다. 붓다의 위치 또한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아울러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사항은 기존의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불러들이는 오류도 현혹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冒頭)의 단락에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 공덕이 많은 선남자 선여인들은”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인연(因緣)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과거’, ‘선근 공덕이 많다’는 대목도 여기에 견주어 보아야 한다. 서두의 이 말은 마지막 단락의 ‘재가의 신도들;,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승들’이란 용어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미 도출된 셈이다.

 

 금세나 미래제에 메시지를 받을 자는 대단한 선근 공덕자이다. 이 말은 그만큼 정법을 만나 수행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는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역시 공간은 ‘남섬부주’ 대상은 ‘선남자 선여인’이란 것은 이를 밑바탕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연(因緣)만의 소치로 봐서는 안 된다. 믿고 따르는 자는 모두 선남자 선여인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큰 수레라는 것은 자기만의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성현과 차이나는 것은 그 추구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있음이다. 사실 형이상학의 가치는 ‘믿음’에 있다. ‘믿음’이란 것은 단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따지려고 한다면 그 가치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과거로부터 경험한 사실을 갖고 선(善)을 정의한다고 할 적에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 속에 그렇게 받아들이는 지고(至高)한 그 무엇일 뿐이다.

 

 여기에 수학의 잣대나 과학이 실험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장애적인 요소가 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이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논증을 거쳐서 결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인식은 그 믿음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옛 것을 믿고 좋아하여 힘써 구했을 뿐이다. 라고 말한 공자의 형이상학은 한갓 ‘믿음’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반증하는 말들이 ”나는 기술하되 짓지 않았으며 믿되 옛 것을 좋아하였으니 노팽(老彭)에게 비유될 수 있겠구나!“ 라고 한 것이며, ”두텁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라고 하는 말들이다.

 

 ‘믿음’이란 것은 화자와 청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믿음은 현상도 아니고 바로 과거의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사실 공자의 믿음에는 그의 뼈 속이 시린 아픔이 있었다. 그는 평생동안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가 노년(老年)에 들어 “꿈 속에서 조차도 이제는 주공(周公)을 만날수가 없구나!” 라고 회한하였던 대목은 이 아픔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구도(求道)가 만약 붓다의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을 만날 수 있었다면, 그는 당대에 대원의 경지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옛 것’이란 성현이 남긴 것을 말한다. 하물며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도 못 믿는다면 그것은 인식의 문제도 아니다 사실 이 ‘불신병(不信病)’은 어떤 명의(名醫)도 치유할 수 없는 ‘무지(無知)의 병(病)이다.

 

 정법(正法)이 정법 되고, 정법이 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믿음과 믿지 못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 붓다의 추천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은 ‘정법을 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법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있음이다. 모두(冒頭)의 ’이 책을 의심말고 믿을지니라‘라는 간곡한 당부는 정법이 수행으로 옮겨 질 적에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씀인데, 3천년 전의 영산시절(靈山時節)에도 석가 세존은 이 불신벽(不信癖)에 끊임없이 시달리셨고, 그 3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불신벽에 또 다시 시달리신 셈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그야말로 제격이다.


 한편 이것을 뒤집어 보면 이 저서의 출현과 동시에 뜨거운 시비의 논쟁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의미도 함 담겨져 있음을 또한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가의 인연이란 사실 믿음의 소치일 뿐이다. 붓다는 이것을 두고 “헤아릴수 없는 과거로부터 선근공덕”이라 하고,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선근자만이 영체(靈體)가 귀먹지 않는다”고 하신다.

 

 불경 결집(佛經結集)도 여타의 성경(聖經)처럼 탄생부터 이미 그 신화를 안고 있었다. 결집 당시 습기 찬 인도 땅은 인쇄문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구전(口傳)도 달빛을 쏘이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도중에 첨가된 논서(論書)나 주석(註釋) 또한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 한 세기 안에서도 그 맥이 제대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만큼 변질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중간에 첨가된 주석 또한 해석에 따라서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간화선이 그 정통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라면 영산 당시의 붓다의 정법은 그 빛을 잃게 되어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첨단문명의 시대는 더 이상 이런 현상을 묵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대적인 사명감이 이 저술의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모든 불경(佛經) 위에다 이 저서를 놓겠다.”고, 만현 큰스님께서 전하는 붓다의 의지는 이 저서의 위상이 무엇인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정(正)은 (邪)처럼 많은 언어로 포장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정곡(正鵠)으로 그 실체(實體)를 드러낼 뿐이다.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석가 세존, 문수, 가섭, 아난으로 모두 정법(正法)의 법통(法統)으로 맺어진 사이다. 사실 오늘날 정법이 존재하는 것은 가섭과 아난의 공로이다. 붓다 입멸후 왕사성의 제1차 결집을 주도한 인물은 가섭이었다. 이 때 내몰린 아난을 불러들여 경을 암송케 한 것 또한 가섭이었다. 가섭과 아난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법통을 주고받았다.

 

 지혜(智慧)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한 손의 칼은 정법의 수호를 의미한다. 금세기에 불과를 이룬 아난은 문수의 법왕자(法王子)이다. 큰스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문수보살님께서 지혜를 주셨다고 하였다.”그렇다면 정법(正法)은 이 네 붓다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정법은 석가 세존한테서 나왔지만 그것을 지키고 이어가는 몫은 세 붓다의 손에 달려 있음이다. 그 가운데 용사(用事)를 하시는 분은 자재통왕불(自在通王佛)이다.

 

 그렇다면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전생과 정법에 얽힌 일화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지난번 인터넷에서 전생문제(前生問題)을 놓고 논쟁을 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불가(佛家)의 형이상학(形而上學) 자체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수행(修行)이란 과거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내는 작업이다. 적정삼매(寂靜三昧)는 무량광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인데 전생 이야기쯤은 당연히 그 이전에 나와야 되는 것이다.

 

 큰스님 수기(授記)는 법화경(法華經)에 나온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난과 석가 세존의 인연이 매우 깊다는 사실이다. 영산 시절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석가 세존과 아난은 공왕여래(空王如來)를 스승 삼아 수행하던 도반 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석가 세존은 용맹정진의 두타행(頭陀行)을 하셨고 아난은 정법을 하나라도 더 듣고자 하셨던 것이다. ‘아난의 전후생의 수행기’는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정법(正法)’을 홍보하여 전하는 일로 발원을 삼으신 것이다. 그 보살원도 이 다문(多聞)의 정법홍보(正法弘報), 수호(守護)등인 셈이다.

 

 이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난은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 기억을 보유하는 자가 되었다.” 라는 붓다의 말씀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듣는 데도 돌아서면 각각 말이 달라지는 법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놀란 과정에 군더더기가붙게 되고, 게다가 세월 흐르면 어느새 ’정(正)‘과 ’사(邪)‘는 혼돈에 빠져 사가 성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물에 절목이 있듯이 정법의 관리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 소임이 바로 아난에게 있음을 이 수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을 헤아려 보면 아난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붓다의 생멸이 다할 때까지 영원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남게 됨을 알 수 있다. 모든 붓다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지만 오직 아난이 이룬 붓다의 수명만이 붓다와 영원함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붓다는 아난이 없으면 ’정법용사(正法用事)를 하시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수기하실 적에 꼭 나오는 사실 가운데 하나가 불호(佛號)를 그 미래불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수기품에서 아난에게 주시는 불호는 단순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는 그의 공덕과 지혜가 산과 바다와 같이 높고 크고, 마음이 자재하여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통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수기품을 살펴보면 아난이 수기를 받을 적에 ‘주변 상황’이 매우 소상하게 기술되고 있다. 굳이 다른 보살이나 성문의 수기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자리를 함께 하였던 2천 명이라고 하는 수행자들이 아난이 불과를이룬 그 한량없는 공으로 모두 과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치 및 가정은 모두 상징적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산 당시 그 인연들이 아난과 함께 불과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타의 보살행과는 그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보살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공유하는 공간 폭이 엄청나게 넓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아난의 공덕에 대한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 수기품(授記品)>을 갖고 아난의 불과를 이룰 당시 세속의 그의 보살행을 더듬어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영산의 인연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어 아난의 정법기치를 보좌하게 되므로 교단의 세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나게 늘어나서 아난의 ‘명성과 명예도 국경을 넘어 세계 각국으로 떨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불보살의 원력까지도 함께 하므로 사법(邪法)은 하루 아침에 그 뿌리까지 뽑히게 된다.

 

 정법을 전해주고 수호하는 아난의 공덕은 참으로 크다. 이<수기품(授記品)>을 보면 붓다에게도 멸(滅)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모든 종류의 공덕을 갖춘 여래로 극찬되는 것을 보면, 절대무아(絶對無我)의 세계나 이 현상세계(現像世界)에서의 아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모든 붓다의 보살행의 발원을 살펴보면 어느 한 분 빼 놓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한 몸에 모든 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붓다의 보살행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아난의 자리가 결코 비어서는 안 된다.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 성수(聖手)에 쥐어진 칼은 삼천대천세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정법이 흔들려 질서가 깨질 경우 그 혼란이 불러들이는 재앙은 실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계가 아무 탈 없이 하나로 엮여져 돌아가게 하는 데는 그 숨은 보살행(菩薩行)의 대발원(大發願)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광명불(光明佛)의 배후를 생각해야 한다. 배후란 병풍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용(用)에 대한 체(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도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의미한다. 두 분은 붓다 입멸후 이 생까지 삼생(三生)을 같이 하신 인연이다.

 

 맨 먼저 중국에서 태어나 한 생을 같이 하셨고, 다음은 일본에서 그리고 차생은 대한민국 땅에서 함께 하신 것이다. 처음 만나 도반이 되시자고 약속을 하실 적에 ‘부처님 정법을 펴시자’고 하셨다니 이미 각본에 짜여진 지중한 인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추천사에서 석가 세존께서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덕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라고 밝혔듯이 이것은 필연의 인연임을 암시한다.

 

 사마천은 그의 열전(列傳)에서 사귐의 표본을 들춤에 춘추시절 제(濟)나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을 거론하였다. 관중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욕심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를 평생토록 변함 없이 지켜준 사람은 포숙이었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관중은 그의 이복동생 규(糾)의 편에 섰고 포숙은 환공을 도왔다. 이 때 규는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고 관중은 잡혀서 죽게 되었다. 하지만 포숙은 환공을 설득하여 그를 재상으로 기용케 하였다. 제나라는 관중의 등용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포숙이 마음을 다한 것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둘이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맡았으나 이익금은 관중이 독차지하였다. 그럼에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 여겼다. 함께 전쟁에 나아갔을 적에 관중은 3번이나 도망을 쳤는데도 포숙은 관중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호하였다. 이와 같이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주었다. 훗날 관중은 “나를 낳아 준 자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자는 포숙이었다.”라고 술회하였다.

 

 필자가 이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논리의 전개 과정에 끌어들인 것은 “이 생에서 광명불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또 다시 불과를 이루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지난 봄 춘천법석에서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노자(老子)는 이것을 두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중을 숙연케 하셨던 이 말씀은 광명불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영산 시절의 아난이 금세기에 몸을 나툰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큰스님께서는 자신의 저서에서 광명불과의 인연은 석가 세존의 명이었다고 말씀하시고 그 일화의 소개는 훗날로 미루고 계신다.

 

 사실 일찍이 아난의 그릇을 알아보신 분은 붓다였고, 가섭은 바로 그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가섭은 아난의 도반이자 스승이다. 붓다 입멸 후 출가 수행 오백의 성중이 아난을 물리쳤을 적에 일주문 밖의 아난을 불러들인 보살은 가섭이었다. 붓다에게서 받은 법통을 어느 누구 한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서슴없이 그에게 전수하였던 것도 가섭이었다. 3천 년이 다 되도록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스님께서 는 자신의 저서에서 광명불이 자신을 이끌어주셨던 몇 가지 법문을 소개하셨다. 큰스님께서 일반대중이 아닌 현지사 신도만을 상대하는 자리면 광명불의 공덕을 빼놓지 않고 설하신다.
광명불을 체(體)로 놓고 자신을 용(用)으로 삼는 것, 또한 언제나 잊지 않으신다.

 

 불과를 이루면 실로 불가능이 없는 능력을 소유하였음에도 스스로는 그런 말을 금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필자가 지금까지 지켠본 바로는 큰스님 자신은 그냥 정법의 도구일 뿐 그 자신의 존재를 그 자신에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는 붓다의 메시지는 그 이타행(利他行)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 저술의 시간과 공간의 바탕은 지금까지의 저술 가운데 가장 폭이 큰 자료이다. 세인의 수기(手記)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석가 세존의 수기(授記)를 받아 불과를 증득한다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보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섭, 아난 두 분 모두 인도의 영산당시 최상수(最上樹)의 보살 경지를 이룬 분들이다. 이 메시지의 시간의 흐름은 3천 년을 그 사이에 둔다. 공간의 폭은 인도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남섬부주의 땅이다. 행여 독자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간과 이 공간의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이 두분의 공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불법이 가장 타락한 곳이 대한민국 땅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멸의경>>의 내용대로 무계(無戒)를 바탕으로 매불자생(買佛資生)하는 곳은 아마도 대한민국뿐일 것이다. 소승이 주류인 동남아 불교는 제도적으로 엄격한 승려생활을 해야 한다. 대체로 불교를 국교(國敎)롤 신봉하는 국가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엄격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국민들 또한 그들이 계행을 지킬 수 있도록 안전 장치를 마련해 준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는 재가자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들 스스로 보신을 위한답시고 계율에 어긋나는 음식들을 만들어 공양하고서 돌아서면 욕을 하는데, 필자는 사실 이러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동업중생이라 해도 그렇다. 이웃 나라 대만 같은 경우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조차도 수행자를 ‘채식식당’으로 안내하고 그들의 음식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데, 신도 들까지 나서서 그러한 행위를 부추기는 것은 사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도량은 절대 청정해야 한다. 중생이 발원하면 불보살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청정한 도량을 가꾸는 것은 결코 승려들 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가자들의 의식도 같이 어우러져야 한다.

 

 3천년의 시간이란 불법의 한 사이클을 이루는 시간이다. 대체로 초기500년, 또는 1000년을 정법시대(正法時代)라고 하는데 부처님 정법이 제대로 지켜져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들이 많이 나온다는 시기이다. 그 다음 1000년을 상법시대(像法時代)라고 하여 수행자는 많으나 증과(證果)에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는 시기이다 그 다음 500이나 1000년을 말법시대(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 퇴색하는 시기로 타락한 불교의 모습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정법’과 ‘상법’이란 말은 초기 경전에 해당하는<<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데 중국 규기에 의해서 ‘말법시대’까지 덧붙여 해설되는 것을 보면 시대적인 변화도 가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 야운(野雲)의 자경문(自警文)을 빌어 말하자면“말법시대에는 마(魔)는 성하고 법(法)은 미미하여 중생을 바르게 이끌어 주는 이는 적고 남을 그르치게 하는 사람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우는 것’이 이치이다. 메시아의 출현은 바로 이 끝자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수순이다.

 

 인도와 대한민국의 공간적인 구도는 불교가 전파되어 있는 모든 영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끝자락은 일본이 아니냐고 따질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풍수지리의 형국론상 일본은 한국 땅의 좌청룡일 뿐 천지의 맥이 들어오는 본체가 아니다.정법을 바로 잡아줄 메시아는 본체(本體)에서 나오는 것이며 좌의 사(砂)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필자가 수 년 동안 고찰한 풍수지리의 형국을 갖고 따지자면 ,우리나라 땅에서 위대한 대성자(大成者)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주의 힘을 끌어들이는 대맥(大脈)은 우선 시발점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지맥(地脈)을 대혈(大穴)로 끌어서 보내 줄 동정호(洞庭湖)같은 큰 호수가 필요한데 백두산 천지못이 제격이다. 풍수지리상 어디 하나 빈자리 없이 딱 들어맞는 못이다. 동정호가 그 역할을 할 없는 까닭은 지맥의 줄기가 그곳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주의 기운을 끌어들인 대연(大淵)이 있으면 아래로 땅의 기운을 당겨오고 위로 하늘의 기운을 끌어오는 수천수만 의 화성(火星)이 필요하다. 화성이란 바위 끝이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여 뾰쪽뾰쪽 날이 선 산자락의 형체를 말한다. 이 세상에 서 금강산처럼 이 화성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는 산은 없다. 흔히 비결(秘訣)을 희론 삼는 자들이 우리나라에서 1만2천 현인(賢人)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금강산의 1만2천 봉우리를 갖고 한 말이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무너지는 것이 있어야 일으켜 세울 곳이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를 받아들여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그동안 원효(元曉), 의상(義相)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불(佛)이 있는 곳에 마(魔)가 있다. 무너진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곳은 대한민국 땅 뿐이다. “가섭과 아난이 대한민국 땅에 왔음을 선포하노라.”라고 죽장을 땅에 치신 금구성언(金口聖言)은, 그래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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