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붓다의메시지존평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

불제자 2010. 7. 22. 12:47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화엄의 세계를 이 시대에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며 세상에서 그를 믿어줄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현상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 문제인 셈이다. 이 믿음의 문제는 영산 당시에 부처님께서도 끝없이 시달린 문제였다.

 

 교단 내부의 수행자들의 불신(不信)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의심병은 아상(我相) 때문이다. 초각의 경지에서 약간의 맛을 보고 마치 모든 것을 얻은 것인 양 차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대승경전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 일이다.

 

 세존께서 “내가 찬양한 칠불여래(七佛如來)의 명호와 공덕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경계라서 실로 알기 어려우리라. 너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라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 아난존자는 “부처님! 저는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믿음이 부족하여 여러 부처님의 지극히 깊은 경계를 듣고도 ‘어찌 한갓 칠불여래의 이름만 염송해야 하겠어. 그것만으로 그렇게 큰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고 하겠어’ 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고 비방하옵니다. 그래서 덧없는 한 세상에 큰 이로움과 즐거움을 잃고서 모든 악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법문은 칠불의 이름만 염송해도 그 공의 얼마나 큰지를 설한 것으로 <<약사경(藥師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영산 당시 아난은 상수보살의 경지였다. 그런 아난에게까지도 부처님께서 ‘믿음’이란 인식의 문제를 확인했어야만 하는가 의문을 갖게 한다. 붓다는 아난의 믿음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이 질문 자체를 대중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불과를 이루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세계를 설하실 적마다 예외 없이 제기된 것은 ‘믿음’의 문제였다. 믿음이 문제되는 것은 아난의 지적처럼 ‘비방’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비방은 엄청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삼지삼청(三止三請) 이 나왔던 것이다.

 

 공자는 평생동안 천하를 주류하였다. 춘추시대는 그의 진정한 정치철학을 현실과 괴리문제를 내세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세상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로 간다.” 는 맹자(孟子)의 푸념 또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세(勢)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역사는 성인을 ‘믿음’으로 평가해 주었지만 당 시대는 ‘비방’으로 빛을 가리게 한다 비구니를 수행자 반열에 세우고자 한 것 도 아난의 지혜였지만 당시 교단은 그것만을 갖고도 그를 따돌림하였다.

 

 지혜는 과거의 반추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성인은 지혜의 상징물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일 뿐이다. 미래는 현실이 안주를 담보하는 무형의 재산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믿음은 미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개인의 인식 여하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한다.

 

 진불 출현(眞佛出現) 또한 세상의 따돌림이 따르고 누리꾼들이 비방을 일삼게 된다. 누구를 기리고 비판하는 것이나, 누가 참이고 거짓인가 가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유한 권리가 아니다. 근거에 의한 기림이고 비판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전체 분야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호도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이 만약 참이 아닌 가짜라면 그가 저서에서 밝힌 오도송도 분명 어딘가에 허점이 있어야 한다. 다름 아닌 불교사상의 맥락에서 그 맥을 같이 하지 못하는 필연의 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텍스트를 분석하여 무아설(無我設)과 진공묘유설(眞空妙有設)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話頭打破頌

 

 다겹생(多劫生)의 업(業)의 나무 무성하더라
 팔만사천 가지마다 줄기마다
 망상 꽃이 피었더라
 내 이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더니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

 거짓몸뚱이 산산이 부셔져
 가루되어 없는데
 착(着)할게 어디 있는가
 마음 마음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이 글은 아난의 후신인 자재 만현 큰스님이 화두를 타파하고 공(空)을 체험하는 순간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이런 글귀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자재 만현 큰스님만의 언어일 뿐이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큰스님께서 공을 철견하시고 그 희열 을 노래하신 것이다.

 

 당시 오도(悟道)의 순간을 큰스님께서는 “며칠 화두가 잘 들리더니 <<금강경(金剛經)>>을 큰소리로 봉독하던 중에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데도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하면서 세상이 확 뒤집혔습니다.”라고 술회하신다. 화두 타파(話頭打破), 여기까지는 기존의 선지식들과 똑 같은 경험을 하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많은 선사(禪師)들의 시(詩)를 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오도송(悟道頌)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실 세간살이의 모습을 읊은 것이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서 보면 모두 한갓 망상을 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의 무상함을 백천 번 노래한들 그 무상이 실상화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끝 간 데서 자신이 오도의 희열로 나오는 소리, 그게 바로 오도송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가 부정되는 맨 끝자락의 언어와 비언어의 세계가 만나는 바로 그 곳에서, 다시 무아의 언어로 나오는 소리이다. 때문에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는 오도송처럼 우리 뇌리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끔씩 기존의 오도송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선사도 있지만, 자신의 언어가 부정되는 천둥보다 무서운 소리 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오도송은 언어의 시체 썩은 냄새만 풍길 뿐이다.

 

 이 짧은 텍스트가 주는 신서함은 그동안 언어의 인식 속에 갇힌 우리의 좁은 의식을 일순에 우주 밖으로 내팽개쳐 드넓은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 분석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분석하면, 인간 육신과 영혼의 참모습을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한 글이 바로 이것이다. 영산 당시 부처님 수기(授記)로 금생에 오신 붓다의 오도(悟道)가 아니고서는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기절(起節)을 살펴보면 오욕(五慾)으로 가득 찬 우리 육신을 ‘업(業)나무’에 비유했다. 여기에서 만약 단순한 업나무만으로 우리 육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견주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절름발이 빗됨 밖에 되지 않는다. ‘다겁생’, ‘팔만사천’, ‘망상’의 수식어는 이 인간의 몸뚱이를 가장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겁생’은 무한한 시간을 상징하는 말이다. 사실 이 생의 우리 육신이 거친 시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그 간격을 잴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주의 모습이 과거와 다르고 그 진행의 속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드러냄에 있어서 ‘다겁생’이란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이다 업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팔만사천’에 비유한 것은 우리 번뇌가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의미한다 붓다의 팔만사천의 법문도 이것을 뿌리 삼아 설하였다 고한다.

 

  ‘망상’이란 말을 가지 끝에 핀 꽃의 수식어로 삼은 것, 또한 팔만사천의 번뇌를 달리 이름 붙인 것이다. 불가(佛家)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비롯해서 꽃과 많은 인연을 갖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상한 사물의 본질을 설함에 있어 꽃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꽃은 화려하지만 그 생명은 아침 이슬처럼 매우 짧다. 그런데 이 망상의 꽃은 연꽃의 덕성을 상징하는 개부구족(開敷具足) 처럼 꼭 열매를 맺는다. 만약 그 꽃에 망상의 열매가 맺으면 세세생생 육도윤회를 돌아야 하고 무아의 열매가 달리면 이것을 벗어날 것이다. 번뇌망상 없이는 과(果)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꽃은 꽃일 뿐이다. 할 저녁에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고, 하루 저녁에 석숭의 부를 축적하는 것도 망상이다. 하지만 ‘그 실체(實體)는 없다’는 것이다.

 

 승절(承節)은 ‘존재의 근원을 철견’하는 대목인데 시간으로 따지면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무성한 꽃잎의 업나무는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란 하나도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있는 것처럼 속게 만든 장본인이다. 수억 겁 동안 자생의 생명력을 길러온 이것을 모조리 뽑아버렸다는 것, 역시 대선지식(大善知識)의 통쾌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저 단순하게 뽑아서는 각(覺)이 될 수는 없다. 실뿌리 하나하나까지 뽑아내지 않으면 무아(無我)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잔뿌리에 붙은 실뿌리 하나만 남아도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란 말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내’라고 하는 주체는 공의 세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이 글 전체에서 이것을 조명하면 더 없는 강조형이다. 업나무에 대한 상대 주체를 ‘내’라고 내세움으로써 모조리 뽑아서 버리는 행위자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오(大悟)는 이렇게 한 치 한 푼의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절(轉節)은 ‘무아(無我)’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한 것이다. 무아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정보에 놀아나는 인식의 주체 가 없다는 것이다. ‘거짓몸뚱이’는 기절의 ‘꽃이 무성한 업나무’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지금 그 거짓 정보에 놀아났던 인식의 꿈을 깬 순간 ‘산산이 부서져 가루로 없어졌다’는 것은 팔만사천의 꽃이 떨어지고 비로소 무아의 열매가 맺었다는 것이다. 30년이 지나 이루어지는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과는 여기에서 그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읊은 “착할 게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마지막 뒷마무리를 하는 말이다. 결절(結節)에 해당하는 부분이 갈무리가 아니다. 화두 타파의 무아 공을 이루는 행위는 여기에서 이미 끝난 것이다. 이 말을 되돌려 보면 업나무를 무성하게 만든 것은 결국 ‘착(着)’이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범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고대인도 언어로 ‘행위’라는 뜻이다. 행위의 이면에는 신(身)이 있고 구(口)가 있으며 의(意)가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삼업(三業)이라 한다.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표업(表業)이라 하고 속으로 감추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윤회(輪廻 sasra)를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착(着)’이란 무아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큰스님 저서 후기는  “있는 그대로를 보라. 분별하지 말라. 끄달림, 집착, 머묾 없이 보라 .”고 충고한다. 단지 “인연 따라왔다가 그 인연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인 데도 스스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고리를 비로소 바로 정견(正見)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절(結節)은 그 실상을 본 순간 ‘이것이 아니었구나’라고 그간에 허상에 속은 어리석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기쁨인데,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적정삼매(寂靜三昧)의 오도송(悟道頌)에서는 ‘환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마음은 이 업나무 육신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본래부터 비어서 붙을 것이 없음에도 팔만사천 가지의 꽃을 피워 온갖 밖의 사무에다 그 향기를 뿌려댔고 그것도 모자라 갖은 유혹으로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필자는 모든 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허물을 너에게 돌려라’라는 말을 갖고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을 고민하였다. 물론 이 말뿐만이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경학(經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논어(論語)에 나오는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아야 비로소 효라 할 수 있다.”는 대목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선친(先親)을 땅에 묻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알았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을 맺자면 내 존재 자체가 허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 인식의 주체가 나라는 인식 없이 행한다면 상대도 허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절(結節)에 ‘마음’이란 단어가 3회에 걸쳐 나온다. 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앞의 겹쳐 있는 ‘마음’은 양면성을 갖는다. 하나는 중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각자가 이해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시각에 따라서 인식하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세 번째 나오는 ‘마음’은 진정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무착무아(無着無我)의 공(空)이다.

 

 육신이 공하다는 사실은 화두 타파를 하는 순간 어느 수행자라도 체험하는 일이다. 오도하는 수행자 누구라도 희열에서 춤추고 손뼉치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필자가 접한 오도송에서 이처럼 과학적인 논리 구조를 갖고 육신이 공함을 설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오도송은 금생에서 이루어진 진공묘유의 적정삼매송을 그 복선으로 깔고 읊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눈 여겨 볼 대목은 업식(業識)으로 가득찬 육신의 공함을 터득하고 난 그 이후의 행동 양식이다. 둘째 대목의 ‘뽑다’는 행위는 아직은 버릴 것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그 행위만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토굴에서 죽비를 더 맞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오도송(悟道頌)이라 할 수 없다. 시를 논평할 적에도 분명 문제로 삼게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셋째 대목의 ‘부서져 가루 되다’는 말은 이 글의 생명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굳이 그 가치를 따진다면 천금 만금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글의 구도 또한 기승전결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부서져 가루 되다’는 것은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두 가지 행위 모두 완전한 공(空)을 이루기 위함이다. 어디 한 구석에도 착(着)이 붙을 곳이 있으면 그것은 무아(無我)가 될 수 없다. 뽑아서 가루로 부셔 날려 버려야만 비로소 공(空)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는 문제의 제기에서 업나무 형태를 매우 세밀하게 그린다. 팔만사천의 망상 꽃이 피었으면 팔만사천의 열매가 나와야 한다. 만약 이 글에서 열매에 관한 언급이 없다면 이 텍스트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쓰레기일 뿐이다. 필자가 이 텍스트는 공을 과학적인 구조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공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더 이상의 치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대목의 ‘망상’, 둘째 대목의 ‘거짓’, 셋째 대목이 ‘본래부터 없는 것’은 모두 육신의 ‘공’함을 의미한 말들이다. 이 수식어들의 주체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팔만사처 꽃의 ‘열매’에 해당한다. 모든 불경(佛經)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말,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다시 한 번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메시지 존평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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