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붓다의메시지존평

간화선 실체

불제자 2010. 3. 8. 21:17

 

 

 

 

 

 

 

간화선 실체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조사선(祖師禪)이 주도하고 있다. 이것을 일명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데, 그 정통성을 따져보면 사실 족보가 없다. 교단 안에서조차도 그 핏줄이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정법 수행과 코드가 맞는 것도 아니다. 각각 문중마다 그 맥을 짜 맞추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간화선이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한국 불교를 대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화두 탐구로 공을 타파한 이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무아 속 절대세계로 들어가기 전후의 수행록을 제시해야 하는데, 간화선을 추구한 수행자 가운데 그런 대원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있긴 뭐가 있어, 보림을 잘 해야지 이 정도의 법거량이 오고갈 뿐 확실하고도 명확한 지표를 제시하지 못한다. 때만 되면 ○○대회니 이름 붙여 수행자들을 불러모아 자파 문중(自派門中)의 위상을 높인다고 하지만 오고가는 언어를 살펴보면 며칠만 연습해도 누구든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 어떤 경지의 의미를 함축한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과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공의 현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일 뿐이다.

 

 그들이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근본 원인은 스스로 말한 것을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병마를 여의기 위해서 수행을 일삼았다고 말하고, 그 수행자들은 생전에 스스로 어느 경지에 이른 것처럼 뉘앙스를 풍겼지만, 그들이 법석에서 말한 그 병마의 덫에 스스로 걸렸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어느 한 두 수행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면 표본을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금생에서 큰 공을 쌓아 내생에서 일어날 업장까지 차생에서 받는 사례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이미 대중 앞에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르렀다는 경지가 문제이든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253~258>>

 

 사실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실존의 붓다의 세계를 부정하고 육도윤회를 부정하며 무애(無碍)를 들어서 걸림 없이 행하는 것을 마치 묘유(妙有)인양 그행위를 포장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성숙된 사회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한갓 만행일 뿐이다.

 

 필자는 연전에 학인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물론 취화선이 담아낸 한국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것이지만, 경허선사의 행적을 영상에 담아 무상의 도리를 유럽에 소개한다면 그 보다 더 나은 우리 문화의 소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도 필자의 뇌리 한편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극과 극을 달리는 그의 만행 모두가 공을 설명하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구렁이가 가슴에 똬리를 튼 상태에서도 정진하는 그 모습은 더 없는 두타행 이었지만 유부녀를 희롱하는 행위까지 과연 공의 도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대선지식을 독대하는 자리면 이것을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금년 7월 하순 경, 큰스님을 뵌 자리에서 큰스님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 그런일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수행자가 공을 타파하면 천상에서 그 때부터 특별 관리하게 되는데 음행은 그 그릇을 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히 법을 설하여 주셨지만 지면이라 차마 싣지 못함을 독자들이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큰스님 저서 곳곳에서 이미 언급된 사항이다.

 

 그리고 만행 가운데 가장 용서될 수 없는 일은 실존의 붓다를 부정하는 것인데 이 과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진정 매혹적인 말이다. 자존을 한껏 세워주는 이 말이야말로 정말 귀에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이 달콤한 만큼 무서운 독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바로 부처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부처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순일 뿐이다.

 

 자존(自尊)은 비록 수행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갖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는 몽땅 버리고 가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행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자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생각이 결국은 자기 이외에 누구도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셈이다.

 

 그들 앞에서 교학(敎學)을 수행으로 삼거나 독송(讀誦)을 소임으로 삼는 수행자들은 근기가 매우 천박한 자들로 낙인찍혀 언제나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 그동안 간화선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친 것인지, 지금 철저히 반성하여도 늦지 않다. 붓다와 경전을 무시가 아니라 멸시하게 한 점, 이것은 분명 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적인 사건은 한 단락만을 요구한다. 그동안 무량광을 채험한 수행자가 없었기 때문에 몰라서 저지른 행위로 용서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밝혀진 상황에서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을 역사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전쟁 등에 대해서 만행이었음을 정식으로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지금 간화선이 이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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