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붓다의메시지존평

천도제

불제자 2010. 2. 22. 22:23

 

 

 

 

 

 

 

 

 

 

천도제

 

 

 

인터넷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거리가 되었던 분야가 바로 천도재였다. 이것은 사실 일의 수순이 뒤바뀐 것이다. 일을 추진하는 데는 그 선후가 있다. 진정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으면 큰스님 정신세계를 갖고 따져 물었어야 한다. 만약 불과를 증득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행위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바로 금기사항에 들어간다. 그 업보는 너무도 지중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릴 수가 없었다면 왜 그렇게 되는 지에 대하여 좀 더 세부적인 점검을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수순의 절차를 무시한 채 마치 모든 것을 검증한 것 처럼 몰아세웠다. 지금도 필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그렇게 많은 불교 지식으로 자신의 의식 속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비추어 보았다면 분명 투영된 뭔가를 발견하였을 터인데도 그런 언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하고 불교TV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였던 분들은 필자보다 훨씬 많은 불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의 소치인지는 모른다.

 

 비용의 많고 적음을 입에 담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뿐이다. 비용은 정성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마음 그릇을 갖고 어디에다 판을 벌려 시비를 일삼는 것은 그 시비 자체를 유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조그만 물건을 사는 데도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이란 다른 말로 바꾸면 결국은 빚에 불과한 것이다. 얽히고 설킨 것 자체가 빚이 아니었다면 바로 공하였을 것이다. 수 없는 과거 생을 스치고 지나갈 적에 그냥 무아였다면, 이 생에서도 얽힌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래 면목을 찾고자 할 적에 그 장애가 나타나 대가를 지불해 달라는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좀 더 깊이 본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빚은 그 가운데서도 바로 빙의(憑依)이다.

 

 지난 봄 춘천 법석에서 큰스님께서 그 당사자와 얽힌 영가를 불러와야 하는데 허공에 떠있는 영가들은 어딘가로 숨어 버리면 지장보살님의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능력만이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툭 튀어나오는 순간 성중들이 잡아옵니다. 라고 하신 것을 필자가 들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이다. 영가를 수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지난 해 불교TV 법문 때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사기행위입니다. 라고 준엄하게 법장을 내리치셨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대목과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빠져있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결국은 부처님 신통으로 천도 된 일을 묶어서 생각해 보면, 천도라는 것은 본래부터 붓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이 말을 쉽게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이다. 필자가 현지사의 천도재를 살펴본 바로는 영산 시절의 목련존자 어머니 천도와 그 절차나 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 천도재 문제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던 부분이므로 본론에서 필자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한다.

 

 자재 만현 큰스님을 탐구함에 있어 큰스님께서 제창한 칭명염불의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천도재에 있다. 이것을 단순하게 기존의 재의식의 하나로만 바라볼 경우 현지사의 칭명염불의 수준 또한 기존의 염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현지사의 수행 과정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결론에 이르게 된 동기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감을 .잡았고, 불교TV를 비롯한 여타의 자리에서 설하신 테이프 등을 통해서 그렇게 결론을 맺어도 큰무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그동안 간화선이나 염불등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수행을 일삼은 체험자들의 입담을 통해서 마무리하였지만, 다시 한 번 사실 확인을 위하여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불교사상을 연구해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것인데········.” 라는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재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천도재와 효의 함수관계는 누구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불가와 유가가 개입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이미 천도재에 대해서는 송대(宋代)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유생(儒生)을 자처하는 자들일지라도 다수가 공유하였던 것이므로 굳이 사족을 붙여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라는 것은 동양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로서 자리매김되어 온 보편적인 가치관일 뿐이다. 중국 유가에서 효를 거론하며 마치 유가의 고유한 사상의 근저인 것처럼 포장해서 도가나 불가 등을 싸잡아 공격한 것은 분명 억지이다.

 

 가치관이란 것은 어떤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정된 어떤 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폭을 상실한 것이므로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儒家)에서 인()을 구하는 문제나 불가(佛家)에서 자성(自性)을 찾는 과정에무엇 때문에 굳이 조상을 끌어들여 효를 논해야 되느냐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첨예하게 대립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 논쟁에서도 이미 제기된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모두가 선으로 받아들인 인()이란 것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방법론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 간다. 10) 라고 맹자가 한탄하였던 것은 유가의설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러나 그 이후 양묵의 세는 사라지고 유가의 사상은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심성에 뿌리를 둔 유가의 보편성에 있었던 것이다. 인의 실천은 자신을 기준해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친친인야(親親仁也)’ 11)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가의 한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보는 것까지는 그 인식에 있어서 씨앗을 거두었지만, 그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이것은 경지의 한계이므로 누구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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