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영산불교 현지사 113

선 불교의 한계

선 불교의 한계 선 불교에서는 인연을 멸하여 생각의 생멸까지 쉬게 하 는 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생멸을 그치게 하는 것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아라한위나 잘해야 보살위에 지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더욱 아쉬운 사실 은 오늘날의 간화선 수행법으로는 아라한 이상으로 높이 올라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수행자들의 실정임을 여실지견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화두선은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해 나가는 수행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화두선 또는 간화선을 통해 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해서 정신병, 주화입마, 상기병 등에 걸 린 수행자들이 적지 않다고 수행자들 간에 은밀히 회자되고 있 다고 합니다. 선 불교의 폐단은 너무 편협하고 독선적인 아성을 구축 하고 있다는 ..

비아설(非我說) - 비아(非我)가 윤회한다

비아설(非我說) - 비아(非我)가 윤회한다 불교의 역사가 2600년이지요. 깊은 선정에서, 더 깊은 고요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량겁 전이죠? 그건 우리가 다 아셔요. 이 점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 인간세계에 사람 몸을 받아와가지고 지금 살고 있잖아요. 그 2600년의 불교역사가 너무도 왜곡 되었다는 말입니다. 뭐가 왜곡 되었느냐? 여러분, 이제는 이 노래를 자꾸 불러야 되겠어요. 뭐가 왜곡 되었느냐? 이 왜곡된 부분을 그 어떤 석학도, 그 어떤 큰스님도, 그렇게도 많이 출세했던 큰스님도, 이것을 이야기 못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부처님에 버금간다고 하는 인도의 '용수보살'도, '마명'이라고 하는 그 보살도(그 큰스님도), 그 다음에 200~300년 후에 출세했던 '무착', ..

무아설(無我說)

무아설(無我說)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는 삼법인(三法印), 혹은 사법인(四法印), 이러한 종래에 없었던(인도 철학계에 없었던) 새로운 사상을 내놨습니다. 그 중에서 특색이 무아(無我)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여기에서 이제 무아(無我)가 나옵니다. 얼마 전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무아(無我)가 잘못 해석 되었느니라. 자재 만현이 맞느니라. 자재 만현은 법왕자로서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불교가 망한 원인이 되느니라.” 2600년이 흐르도록 그 어떤 종파(교파)에서 큰스님들이(학승들이) 무아(無我)를 ‘그저 내(我)가 없다 하는 식(단순히 내가 없다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심지어 그런 맥락에서 육도윤회를, 그러니까 지옥 천상 아귀세계 중음세계 극락..

영산불교는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

영산불교는 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 -2500년간 잘못해석된 '무아無我'를 비판하면서 1. 무엇이 문제인가? 부파불교시대부터 지금까지 불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무아와 윤회주체"의 문제입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의 요지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나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무아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를 하려면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실체,본체)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의 무아이론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가 없다고 하니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이론과..

언론에 보도된 글 모음

염불선, 거룩한 성자되는 淨業수행 ( 현대 불교신문, 2003. 8. 20 ) 견성은 부처되는 공부의 시작일 뿐입니다. 견성한 이라도 보임과정에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불·보살의 불법을 모독하는 말을 삼가야 합니다. 동산반야회 법주인 무진장 스님과 함께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춘 뒤 20여년간 수행에만 매진해 온 춘천 현지사(033-243-1787) 회주 만현 滿顯스님. 3년 전부터 간간히 불교방송을 통해서만 설법하던 만현 스님의 법문이 본지 435호 ‘지상 백고좌’에 소개되자 많은 출·재가 수행자들의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방송 설법이 나갈 때마다 보였던 이러한 반응은 ‘견성 즉 성불 見性 則 成佛’이라고 하는 선종의 불문율에 대해 과감히 다른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

[언론에 보도된 현지사 글 모음-1]

[언론에 보도된 현지사 글 모음-1] 견성은 공부의 시작일뿐 염불·禪으로 결판 내세요 ( 지상 백고좌, 현대 불교신문, 2003. 8. 20 ) 오늘의 한국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이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생사관(生死觀)하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특히 승려들의 지계정신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크게 눈뜬 성자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을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자리가 극락이라 합니다. 지옥과 극락을 마음의 산물로만 봅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보살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안팎이 있다는 말입니까? 공(空)에 안팎이 있습니까? 마음은 시방법계를..

겁에 하나 출세하는 붓다!

겁에 하나 출세하는 붓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다는 점입니 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제로 어느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원만보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든 붓다의 청정법신을 한 몸뚱이로 하는 세존의 진불인 청정법신 비로 자나불 말입니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 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 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분의 붓다는 그 위..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교학하는 이들은 불교의 무진연기 무아사상 등이 불교의 위대 한 점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위대한 경전 화엄경의 일중다一中多 사상, 보살의 원행願行 사상이나 신비로운 밀교사상, 정토삼부경에 기초한 정토사상 역시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여 불교가 제일이라 주장합니다. 시방삼세를 회통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의와 철학 사상 은 과연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불교경전의 방대함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함부만 해도 1만 8천여의 경들로 이뤄져 있 습니다. 그리고 방등, 반야, 화엄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있습 니다. 티베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 밀교의 그 수많은 분량의 경전 들까지 합한다면, 분량에서도 가히 위대한 종교라 아니 할 수 없 습니다. 또한 불교는..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空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