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깨달음(견성)에서 아라한, 보살에서 붓다에 이르는 도정

불제자 2010. 1. 31. 21:50

 

 

 

 

깨달음(견성)에서 아라한, 보살에서 붓다에 이르는 도정

 

 

 

 

 한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불제자가 보살에서 붓다에 이르는 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친히 설해 주셨다.


 보살이 붓다 되려면

 여러 생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바라밀 수행함으로써

 선근 보따리를 키울지니라.


큰스님께서는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자성을 깨치는 것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코 잘못됐으며, 설사 견성을 하고 나서 보림을 마친다 하더라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이 거룩하시고 희유하시며 거의 절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라고 사자후 하신다.

 

 큰스님의 법문은 가히 기존 불가(佛家)의 사조(思潮)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며 수행 문화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일대의 혁명(革命)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에는 수백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경전에는 전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라한이면서 동시에 아라한을 넘어서는 유일무이한 붓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불교가 불교계를 장악하고 득세하면서부터 아라한과 붓다는 같다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일반 선지식조차 제대로 아라한의 공과(功課)를 얻지도 못한채 그냥 선불교로부터 답습된 관행대로 아라한은 붓다라는 생각으로 일관해 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붓다와 아라한의 경계에 대해서 오도되고 왜곡된 시각이 불교계에 팽배하고 만연해 있는 시점에서 큰스님의 사자후는 가히 몽매한 선지식과 수행자들의 미몽(迷夢)을 확 깨이게 하는 각성제(覺醒劑)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 경지가 아니라 진실한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보살이 보현행원, 바라밀, 그리고 선근 보따리를 키워야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다. 이 얼마나 불제자가 어떤 구도의 과정을 밟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타를 매우 극명하게 제시해 주시는 법문이 아니겠는가?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