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견성에서 아라한으로

불제자 2010. 2. 6. 01:34

 

 

 

 

 

견성에서 아라한으로

 

 


 누군가가 인생이 한 편의 흔한 영화처럼 통속(通俗)하다는 것을 통절(痛切)하게 깨달을 때, 그는 구도자가 되고 그에게는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구도자가 견성을 하면 자유, 해탈(Moksha), 열반(Nirvana)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얻는다.


 그리고 견성 이후 보림을 통해서 아라한을 얻으면 명료하게 자신이 사바세계의 오온(五蘊, Panca khandha)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온에 대한 갈애와 잡착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완전한 깨달음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 말씀처럼 견성은 전생의 죄업, 악연(惡緣 또는 원결), 빚, 습기(習氣, Vasana), 탁기, 집착, 삼독심(三毒心) 등을 모두 완벽하게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견성을 해도 집착이 어느 정도 남아있고 방심한다면 여색(女色)에 미혹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견성을 지나 아라한에 이르면 자신을 속박했던 중생심(衆生心)이 탈각되어 견성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청정심(淸淨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자리도 큰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한 것은 아니다.


 즉, 지옥에 대한 철견, 육도 윤회사상에 대한 완벽한 해의(解義), 자신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견성을 지나 아라한을 얻은 이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또한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라한으로서는 우주와의 계합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라고 사자후하셨다. 여기서, 아라한은 자력이나 타력으로 얻지만 그 이상의 경지, 즉 보살이나 붓다는 자력뿐만 아니라 타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친히 전수받으신 전대미문의 칭명염불선(稱名念佛禪)을 우리 불제자들을 위해 제창(提唱)하신 것임을 명지해야 한다. 재차 강조하는바 큰스님의 법 세계를 가만히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실로 경외로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크나큰 법음(法音)이 메아리 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대법문(大法門)이신 연기사상(緣起思想)의 가르침이 실제로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영롱한 유리알처럼 빛을 내며 점철(點綴)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휘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휘들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물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큰스님의 법 세계(法世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스님의 실증적 사상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큰스님의 법 세계 전체의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통찰하는 안목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재차 우리 불제자들이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정독(精讀)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리라. 또한 큰스님의 법 세계에는 세상에 통속(通俗)한 선악(善惡), 남녀(男女), 애증(愛憎) 등의 이원론적 흔적이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이원론적 시공을 초월한 맑고 밝은 광대무변한 진리의 법 세계만이 오롯이 우리 불제자들을 비추고 있다.


한편 견성에서 아라한으로 가는 도정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견성의 개념을 깨달아야하고, 보림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견성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아라한을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보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라한 경지를 철견(徹見)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칭명염불 수행의 실증적 의미에 대해서 완벽히 깨달아야 견고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으며, 선근 공덕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선근 공덕을 짓는 선남자 선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연구 독송하거나 남을 위해 해설하거나, 부모 조상께 효도를 다한 불자, 그리고 보시, 인욕, 정진 등의 육바라밀을 잘한 자, 진짜 불보살의 회상에 크게 공덕으로 기여한 자, 다라니 염불 공부 잘한 자, 부처님과 그 법을 위해 목숨 바칠 정도로 외호한 자 등을 들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상세한 법문이 아닌가? 또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도야해 나가야 하며, 나 없는 수행인 두타행을 체득해야 하며, 효를 다해야 한다. 한편 자력 수행뿐만 아니라 타력수행으로서의 칭명염불선을 할 때 보다 안정적이고 빠른 기간 내에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PP 207 ~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