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사법인과 삼학을 이루고 도야하는 자리가 바로 아라한과

불제자 2010. 2. 10. 19:43

 

 

 

 

사법인과 삼학을 이루고

도야하는 자리가 바로 아라한과

 

 

 


 그리고 생사윤회의 괴로움과 삼계의 허무함과 통속함을 통절히 깨달아야하며 사법인(四法印), 즉 순서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이해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도야해야 한다. 이 자리가 비로소 아라한과이다.

 

 이러한 아라한과는 삼독심(三毒心)이 다소 해소되며, 빚, 원결에 의한 악연, 억겁의 죄업, 습, 기 등이 표면적으로 탈각되어 지멸(止滅)된다. 이 아라한과는 견성 단계에서의 욕계정(欲界定)삼매를 뛰어넘어 멸진정(滅盡定)삼매 또는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아라한삼매에 이르게 된다.


 큰스님께서는 오늘날의 선불교의 맹습(盲習)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질타하신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 자리가 극락이라고 합니다. 지옥과 극락을 마음 안에서나 찾으며 ‘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이러한 선불교와 현재의 불교의 모습은 진실된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심교(心敎)로서의 불교라고 한탄하신다.

 불보살님의 세계와 극락 정토가 불교 경전에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불교는 고대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이렇게 이상하게 왜곡되고 전도된 불교 사상에 젖어있는 것일까? 그것은 큰스님 말씀대로 불안(佛眼)과 오안(五眼)을 구족하신 영묘(靈妙)한 대선지식(大善知識)이 나오지 않으신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큰스님께서는 “일심 혹은 법성은 시방 법계 어디에도 심지어 티끌이나 먼지 속에도 주변하여 뻗쳐 있습니다. 동시에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영원히 경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성은 청정무구요, 여여부동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큰스님께서는 불보살님의 세계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불교나 현재의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에 대해서도 매우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구유(具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큰스님의 말씀은 견성은 한낱 수행의 낮은 수준이라고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을 통해서 얻은 경지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의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고대 철학 스토아학파에서는 아파테이아라는 평정심, 무변심(無變心), 부동심, 평상심 등을 거론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도 카를 융 박사는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라고 인생 도정을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일컫고 있다.

 고대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전했으며,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도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을 통해서 우주의 근원적 법성으로서의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자아적 아트만(Atman)이 하나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이러한 다른 종교 철학에서 언급하는 깨달음의 세계와 어떤 차별화가 있는가?


 세계 최고의 종교로서 부상하고 있고 심지어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수많은 불교신도들에게 오히려 다른 종교나 철학 세계와 불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예(榮譽)를 실추 시키는 것이 아닌가?


 모름지기 수행자가 자신의 올바른 수행 세계와 정의로운 종가(宗家)의 영예를 진작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타종교와 철학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최고임을 자부하고 있지만 우리 불제자들은 너무 겸허한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는 큰스님처럼 우리 불교의 장대하고 웅대하며 황홀 찬란한 법 세계를 전 세계에 선양(宣揚)해야 할 때이다. 요즘은 흔히 프리젠터이션 시대라고 말한다. 자신을 PR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시기이다. 앉아있다고 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로 노력을 해서 우리 불교의 세계를 대내외적으로 홍포(弘布)하고 포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야합하여 불교의 위신과 영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중단하고 큰스님의 법 세계를 널리 알려 견성으로서의 깨달음이나 공성(空性)과 신성(神性)을 체득한 아라한 경지가 수행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와 명상 수행세계가 잘못된 야합으로 일그러 진다면 사바세계는 지금보다 더 안 좋은 파멸과 퇴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분명 강조하는 바,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와 명상 수행세계는 한낱 견성과 아라한 수준의 경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료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가 이토록 아라한 경지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인간이 증득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경지가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식은 사실 전대미문의 설법으로 그동안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타 종교 영성세계에서는 대선지식이 나오지 못해 아라한의 경지만을 추구하고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불교에서는 아라한 수준까지도 제대로 도달한 선지식이 지극히 드물며 심지어 지옥이 없다라고 하는 실정이다.  지옥이 없으면 왜 수행을 하는가? 그리고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 번쯤 진지하게 의문을 갖고 참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선지식들이 아라한에 한계를 갖는 것은 이러한 지옥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성을 하면 공(空)하다는 것을 알지만 지옥을 관하기에는 턱없이 경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불과(佛果)를 증하면 오안(五眼)을 구족하게 되어 이러한 지옥의 실상을 여실히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지옥을 관하지 못하는 것은 아라한의 한계이니 지옥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선지식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한계를 짓고 더 나아가 부처님의 법 세계를 오도하고 능멸하는 대망어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PP 210 ~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