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견성에 이르는 과정, 선(禪)과 팔정도(八正道)

불제자 2009. 12. 20. 20:50

 

 

 

 

 

 

견성에 이르는 과정, 선(禪)과 팔정도(八正道)

 


수행자가 견성을 얻으면 집착, 번뇌, 세속적 욕구 등이 표면적으로는 거의 사라진다. 즉 무의식에만 잠재된 상태로 남아있을 뿐 표면적이고 외면적으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편안한 해탈 몸을 얻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한시 바삐 해탈 몸을 얻기 위해서는 불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회상을 만나 큰스님을 믿고 끊임없이 과거의 습기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집착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덧없고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인도의 요가에서는 즈나나(Jnana)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식별지(識別智)로 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식별지라는 것은 분별지와는 달리,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대해서 그리고 현상세계의 사건(Event)과 상황(Situation)을 포괄하는 법 세계와 자신의 마음 자리를 잘 살펴보아 중생심(세속적 욕망)과 청정심을 잘 식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위해서는 팔정도의 정사유(正思惟)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즉 허망한 망상과 덧없는 망상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및 파악하는 것은 정사유로서 바르게 생각할 때 가능하다. 정사유는 행동에 대한 마음의 일치를 의미한다. 심신일여(心身一如)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정사유가 확립된다.

 

 즉 심신일여(心身一如)와 정사유는 상호 보완적이다. 따라서 수행자의 경우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마음으로는 딴 것을 생각하면서 몸으로는 일을 하면 그것은 정사유가 아니다. 정사유란 일과 생활을 하면서 시시각각 철저히 몰입하여 마음이 일을 통해서 만족을 하고 즐거움을 누릴 때 얻어진다. 정사유는 몸과 맘이 하나가 되어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행동이 마음과 하나가 이루어지는 지행합일이 될 때 얻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얻어지지 않는 사유는 정사유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수행자가 일과 생활에서 행위들 하나하나에 대해 명확한 성찰(省察)을 얻게 해주는 것이 정사유이다. 반면 정사유를 통해서 지행합일(智行合一)이 이루어진다.

 

 한편 모든 것을 바친다는 헌신(獻身)의 개념도 정사유를 각성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헌신을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는 수행자가 마음으로 가장 바라는 바를 몸을 바쳐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해 헌신하는 것이다. 수행자 자신이 만약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 또는 나라면 열심히 할 텐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망상으로서 독선(獨善, 홀로 옳다고 생각함)이다.


 독선은 정사유를 파기(깨뜨림)한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으로 세상만사와 타인의 세계를 한정짓거나 규정짓는 것 그리고 판단하고 예단(豫斷)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과거 생각과 고정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왜 타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결국 무의식의 습기로서 타인들에 대한 원망을 내재하게 된다. 무의식에 원망이 내재하게 되면 청정심을 가리는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래서 타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알고 그 사람을 배척하고 싫어한다.


수행자가 올바른 마음으로 일과 생활을 통해서 심신일체(心身一體)가 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판단하는 마음을 없앨 때 더 나아가 수행자의 마음과 반연하고 작용하는 인연(因緣)들을 소거(消去)해 나갈 때 수행자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지고 집중과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정사유와 상호 작용하여 생활과 일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몰입할 때 중생심과 착, 습기 등을 하나 둘 탈각되게 한다. 

 

 또한 정사유의 능력을 배양시키고 이렇게 배양된 정사유는 지혜(智慧, Wisdom))를 증장시킨다.  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의미하면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무집착의 일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定)이란 바로 안정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Stability라고 하는데 이 안정성은 바로 고요함, 평화로움, 조용함 등 호숫가의 고요한 상태를 지켜보듯 그러한 편안함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서는 집중과 몰입이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삼매(Samadhi)는 더욱 요원한 일이다. 정사유(正思惟)는 현재 수행자 자신이 하는 생활에 대해서 일념으로 몰입하여 생활에 따른 행위 하나 하나에 마음을 합일시키는 것이다. 팔정도의 정사유를 강조하는 이유가 큰스님의 말씀대로 바로 그만큼 견성(見性)을 얻는데 정사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사항은 선(禪)이란 위빠사나선, 염불선, 화두선 모두 카르마를 제거하는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행자는 현재 삶의 메시지로부터 어떠한 카르마가 작용하고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카르마를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정견(正見), 즉 카르마에 대한 바른 이해(Understanding)로 알고 있다. 그리고 카르마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정사유(바른 생각)가 부가적으로 필요하다.

 

팔정도의 8가지는 매우 유기적인 시스템(체계)으로서 어느 하나 하나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톱니가 얽히고 물려 있듯이 작용하고 있다.  카르마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때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일어난다. 현재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카르마적 이해를 얻을 때 현 상황이 몰고 온 번뇌는 소멸되기도 한다.


 큰스님께서는 춘천 대법회에서 사람이 죽으면 30~40%가 무주 고혼으로 떠돌며 명부에 들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착, 금전, 명예, 권력 등에 대한 탐착 때문에 기인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러분도 생활을 통해서 느껴봐서 익히 아실 것이다.


집착(執着)이란 사전적 뜻으로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한고 매달림”을 의미한다. 흔히 유루(有漏)라고 한다. 에너지의  소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집착은 영혼을 지치게 하는 독(毒)이다. 맑고 맑은 청정심을 가리고 있는 중생심이라고 흔히 말하는 그것에서 비롯된다.

 

 중생심은 물론 삼독심으로서 탐·진·치를 일으킨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독을 담고 있는 중생심이다. 이 중생심이 억겁의 죄, 영혼의 독, 삼독심, 집착, 빚, 습기(Vasana)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게 되면 영혼이 청정해지고 억겁의 죄가 소멸되고 빚이 청산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가슴을 적시는 설법이 아닌가?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며 부처님의 성호(聖號)를 염하고 석가모니불 정근, 칭명염불을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본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일을 도와 공덕을 쌓는 것이 수행 못지 않게 중요하리라. 큰스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선과 함께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이다. 정견은 글자 뜻 그대로 바르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대상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들어와 인식될 때 정견을 바로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그 대상이 왜곡되고 곡해되어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전도 망상으로 휘말리고 정신이 혼탁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인식의 틀을 확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알고 있듯이 바로 정견(正見)을 내면에 확립하여 바로 하는 것에 있다. 큰스님께서는 가장 명확하게 사자후하셨다. 즉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일체 세상과 만유의 속성은 무상(無常, 항상 같지 않음)하다.”고 여실지견으로 관하는데 있다고 말이다.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이며 진귀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큰스님의 심오한 법문을 통해서 불제자들은 존재의 속성이 무상하다는 것, 즉 덧없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공관(空觀)을 증득하고 결국에는 초견성을 이루어 표면적인 탐·진·치 삼독심이 다소간 해소되고 지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심득(心得) 할 수 있다.

 

 많은 수행자들도 체험으로 아는 것처럼 선한 마음에는 악한 마음이 상대적으로 상존(常存)하고 있고 즐거움에는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윤회 세계’는 일체가 ‘고(苦)’이며 삼계는 편안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본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실재Reality)의 진상을 여실히 철견(徹見)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것으로 ‘회귀공(回歸空, 공으로 되돌아감)’을 역설하셨다.


 회귀공이란 바로 선가(禪家)에서 흔히 말하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본래 면목을 찾아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지난날을 참회하여 청정한 마음을 얻고, 둘째 목숨을 바칠 정도의 강한 구도심으로 부처님께 믿음을 보여야 하며, 셋째 부처님께 발원해야 한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또한 팔정도 중에서 정념(正念)을 얻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을 하여야 하며 이렇게 염불선을 닦음으로써 생각이라는 염을 바르게 확립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정정이라는 바른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정(定)이란 선정(禪定)에서 말하는 안정과 고요함을 뜻한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서 선정에 이르러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정명(定命)은 바른 명(命)을 확립하는 것이다. 명이란 바로 목숨, 삶, 생활로서 여기서 정명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 수행자의 경우 바른 생활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로서 선악을 초월한 행위를 의미한다.


 큰스님께서는 팔정도(八正道)는 견성을 하여 보림을 마치고 아라한 위를 얻는 가르침이라고 설하신다. 실상, 큰스님 말씀대로 견성까지만 해도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며 아라한 위는 더 어렵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은 견성과 아라한 위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공부를 중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스스로 공부를 더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그렇다면 왜 자신이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자부하는가? 그것은 수행자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모르면 함구해야 한다.


 견성, 즉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임을 큰스님께서는 설파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겸허하게 견성과 깨달음의 견처에 머물지 말고 더 수행을 하여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를 향한 도정을 걸어야 할 것이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