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

불제자 2009. 12. 13. 00:46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

 

 

 


견성 수준에서 더 나아가 보림을 해 나가면 자신이 공간에서 녹아서 무아(無我)를 체험해 가며 ‘나’없는 수행으로 계속 정진하면 궁극적으로는 ‘가득찬 허공’과 계합되며 은광색의 영혼의 빛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위한다. 그리고 두타행과 염불 삼매, 효 등을 계속하면 불, 보살의 가피를 받아 보살과를 증위한다고 만현 큰스님은 말씀하신다.

 

공(空)을 철견(徹見)하고 깊은 묘(妙)함의 세계를 지나 대적멸(大寂滅)의 세계를 지나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고,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한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신 말씀이 타당한 이유는 부처님의 경지와 아라한의 경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어찌 불과를 얻어 삼천대천세계의 한량없고 무한한 공덕과 복덕을 구족한 경지에 일개 공(空)을 체험한 깨달음, 즉 견성의 경지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저울질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견성을 해야 고요함과 약간의 밝음을 느낄 뿐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붓다가 되면 마음은 고요한 희열과 정화된 환희 그 자체이며 평화로움과 고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신다. 또한 견성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의 경지를 일컫는다. 선가(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한 소식했다는 말이 이 말이다. 즉 본래의 면목, 또는 본 자성 그리고 참나 등은 고향을 찾는 것이라고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본래의 면목이자 마음의 고향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이 되어야 한다. 즉 마음이 하나가 되고 돌아와야 하는 거다. 이것을 큰스님께서는 내면에서 공(空)이 터져 나와 허공이 뒤집힘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공(空)이 처음에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공이 깨졌다가 다시 이루어졌다를 반복하다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정신으로 임했을 때 공(空)이 안정된 상태를 갖추게 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空)은 물론 비어있음을 말한다. 텅 빈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어있으나 눈 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묘함이 있다.

 

 그래서 고승께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셨다.  

참된 공에는 묘함이 있다고 말이다. 그 묘함이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 증득하면 안다. 왜 그 많은 스님들과 불제자들이 오늘도 수행에 정진할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얻고자 함이다. 실재(Reality)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의 변화에도 여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적 체성(體性)이 하늘 또는 허공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걸리지 않음(無碍)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남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체성이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철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외부세계와 자꾸 피곤한 인연을 쌓게 된다. 인연을 녹일 수 있는 약(藥)이 바로 불가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空)은 모든 종교적 깨달음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空)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없다.

 

불가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空)의 세계를 잘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실된 공의 세계로 증입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청정한 마음을 밖으로 꺼내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진실로 생각이 지멸되고 청정한 마음의 체성이 현전 한다.

 

재차 강조하는 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이 매우 효과적이다. 존재계의 실상을 여여히 통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위빠사나선이나 부처님을 믿고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하여 닦는 염불선은 공(空)의 세계를 철견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염불선의 모범적 전형으로서 과거의 그 어떤 염불선보다 우수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재 현지사 신도 분들 중에 견성에 가까운 상당한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많이 있다. 참고로 이러한 공(空)의 체성(體性)과 큰스님의 위대한 사자후인 법신(法身)의 체성(體性)과는 비교할 바 없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임을 명각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 견성을 하여 초견성에 이른 수행자와 불과를 이룬 수행자간에  공 세계(空世界)에 대한 이해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수행이 깊어갈 수록 공의 세계는 본질적 특성상 집착이 더욱 없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 즉 삼라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으로 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과를 증위해 갈수록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無碍)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어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애(無碍)한 자유와 불과를 증위해서 얻은 무애(無碍)한 대자유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현격한 차이를 가지나 공(空)을 철견하면 공 세계(空世界)는 모든 것을 함용하고 있으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리하여 철학적인 세계관을 매우 단순하고도 광범위하게 포용하게 된다.

 

 그리고 공(空)사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순간순간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끊임없는 겸허함과 하심(下心)을 갖도록 해 준다. 공(空)사상의 특징은 단순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여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공(空)의 본성이다.

 삼천대천세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복잡한 것은 없을 것이지만 실제로 증득되어 경험하는 상태는 단순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모든 스트레스와 번뇌는 복잡한 사유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상황과 사건을 온전히 풀이해 내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공(空)은 문제에 대한 해결을 담고 있다.


사바세계의 현상계가 문제 공간이라면 절대 세계로 가는 문턱인 공 세계는 해답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 세계는 맑고 깨끗한 빛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空)을 체득하게 되면 항상 머리가 맑고 고요하며 밝다. 그리하여 ‘나’라는 주관이 사라지고 객관적 세계, 즉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집착없이 대하고 바라본다.

공(空)을 얻으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며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이런 자리를 철견하면 그 어떤 물질적인 욕망보다도 더 큰 고요한 즐거움을 얻으며 모든 물질적, 세속적 욕망을 얻은 것 이상의 기쁨을 얻게 한다.

 

한편 현실적으로 가장 깨달음에 가까운 삶을 사는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나’라는 관념을 버린 사람이다. 이를 관념적인 ‘나’를 타파한 수행자라고 한다.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들의 덩어리로서 모든 아상(我相)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아상을 일으키는 관념을 타파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관념은 선입관과 편견을 일으키며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데 방해가 된다. 물론 올바른 지식과 건전한 양식(良識)은 구도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올바른 지식과 양식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팔정도가 없이는 결코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신의 존재와 세상에 대해 여실지견으로 통찰할 수 없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관념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쓸모없는 지식과 체계화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지식들을 의미한다.


견성,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전도된 지식과 잘못된 정신적 오류들을 그리고 편향된 상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견성을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망각(妄覺, lapse of memory; forgetfulness; oblivion)이란 바로 ‘기억하지 않은’의 의미로써 깨달음은 자신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관념적 존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없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동양 고전에 하늘은 큰 일을 시키기 전에 마음을 괴롭힌다고 하였다. 모두가 부처님께서 수행자를 큰 그릇으로 키우려고 하심이다. 자신의 마음이 괴롭지 않아 보고서는 타인의 마음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남을 지도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괴로움을 통해서 면역 에너지(免疫意識)를 얻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면역 에너지와 면역 의식이 바로 견성(見性)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증득되는 공(空)의 에너지와 청정심의 에너지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내면에 쌓여있는 중생심이라는 독소와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운 청정심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습, 기, 착, 업, 빚 등을 모두 청산하여 중생심을 지멸(止滅)시키지 않고서는 청정심을 깨어낼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말한 대로 새가 새로운 세계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 등의 선(禪)공부 그리고 경전 공부를 통해서 살아있는 지혜를 내면에 얻어야 한다. 지혜가 생기면 집착과 습기 그리고 무지와 두려움의 먹구름은 소멸된다. 초발심을 한 수행자는 세속적인 습, 기, 착, 업, 빚 등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의 중요성을 좀 더 깊이 각인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성(耐性,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이 선(禪)의 핵심이다. 수행자는 정말 여러 가지로 마음이 힘들어도 끊임없이 인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정말 이것은 수행자 스스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는 한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의 개오(開悟)가 일어난다. 불성(佛性)이라는 불종자(佛種子)가 내면에서 자라서 점점 견고해지고, 내면에 꽉 차게 되면 큰스님 말씀처럼 천지를 뒤집어 엎으면서 터져 나온다. 그것이 견성 체험이다. 내면에서 불종자가 자라고 터져 나오기까지 정말 힘든 각고의 정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행자가 올바른 스승의 지도 하에 몇 년만 정말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정진하면 분명 견성(見性)을 얻을 수 있다고 선지식들은 이야기 한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보다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많은 현지사 신도분이 큰스님이 직접 지도하신 칭명염불선으로 수행한 결과 깨달음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진해진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PP 175 ~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