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견성에 이르는 길, 위빠사나선과 염불선

불제자 2009. 12. 16. 21:26

 

 

 

 

 

 

견성에 이르는 길, 위빠사나선과 염불선

 

 

 


 사실,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은 염불선과 위빠사나선이다. 염불선, 특히 칭명염불선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위빠사나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해 볼까 한다.

 

 혼자서 위빠사나선만을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불가능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스승의 지도 없이 단지 위빠사나선 수행만으로는 완전한 아라한 위를 얻는 것이 사실 너무 힘들고 어려우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선은 화두선, 간화선, 조사선보다 효과적이며 부작용이 적다. 그리고 선 수행(禪修行)을 올바르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들 간의 관계를 완벽하게 꿰뚫어 알고 있어야 한다.

 큰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삼법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세상의 번뇌를 타파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다고 하셨다.  결국 우리가 겪는 두카(Dhuka)로서의 고통과 108가지 번뇌들은 모두 배움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고통과 시련 그리고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발심(發心)이 약해진다. 고통이 크고 시련이 매몰차고 번뇌가 치성하게 일어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 질 때 세상에 대한 허무함과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세상 인연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달관해 질 수 있는 정견(正見)을 얻게 된다.  사실, 현상계의 일체가 덧없음을 인식했을 때 그러한 인식이 바로 정견이라고 큰스님으로부터 배워 알고 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고통은 집착(흔히 갈애, 탐욕, 욕망, 갈망 등으로 표현되기도 함)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이 고통의 원인인 집착, 갈애 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중생심으로서 아상(我相)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연의 관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이러한 아상으로서의 견해를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정신 과정(행위)과 육체 과정(행위)이 부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아견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의 부조화는 바로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상태가 안 되었기 때문이며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이 하나의 통합적 흐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고 위빠사나선의 선지식들은 이야기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을 때 그것을 예의 주시하여 자신이 한 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위빠사나선이다. 만약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행동하고 있거나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있다면 심(心)과 신(身)이 일여(一如)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지)와 행(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염불선을 할 때도 입으로는 석가모니불 정근을,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하라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상태가 하나로 통일될 때 삼매로 들어가 견성을 하게 되는 것으로 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실(마을)가는 놈으로부터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시에도 항상 솟아나는 생각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내면에서 이 마실가는 생각들이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는다면 외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잘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모든 일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지혜가 창생(蒼生)한다. 연기의 실상(實相)을 관(觀)해서 성찰해보면, 무지로부터 잘못된 견해(我見)가 성립되고 그 잘못된 견해로부터 갈애와 집착이 생기고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업을 짓고 그로부터 고통이 생긴다고 한다.


 이 고통의 근원인 무지(無明)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심신일여(心身一如, 마음과 몸의 행위가 하나로 같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신이 작용하는 법과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 뜻을 주도면밀하게 예의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체의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은 심(心)에 비견할 수 있으며 무의식은 신(身)에 해당한다. 따라서 심신일여(心身一如)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생멸(生滅)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사념이 두뇌에 확산되는 현상인 빠빤차를 차단하고 자신도 모르고 행동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함으로써 언제나 생각과 행위를 주시하고 조심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의식과 무의식을 정화(淨化)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칭명염불선의 경우 석가모니불을 염송하고 눈으로 부처님 성상(聖像)의 양미간을 관함으로써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면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간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가면 내면에 빛이 생기고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된다고 본다.


 그 경지가 견성(見性)인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성상의 양미간으로부터 백호 광명을 보고 깊은 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화신(化身)을 본다면 보살과까지 증위해 갈 수 있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현지사 법회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역대 선사들과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들은 말은 많은데 정확하게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사자후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분들의 다양한 설법들을 두 시간을 들었을 때 한 가지 지혜를 얻으면 성과가 있을 정도였다.


 이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큰스님을 다르다. 큰스님의 설법은 한 시간만 들어도 의식이 각성되며 심오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 분명 깨달음 이후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는 바로 어마어마하게 장대한 세계라는 것을 매번 확신하게 된다.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한 설법은 다른 선사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PP 182 ~ 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