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만현 큰스님 법문 글/..법문 글 2010년

2010. 4. 7. 수(음2.23) 큰스님 대전 법문

불제자 2010. 10. 21. 21:46

 

 

 

2010. 4. 7. 수(음2.23) 큰스님 대전 법문

 

(BBS불교방송 제1회)

 

 

 


4, 5년 전 불교TV BTN방송에서 6개월 정도 설법을 했던 자재만현입니다. 몇 년이 흘러 이제 BBS 불교TV방송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BBS불교 라디오방송과 BBS 불교TV방송을 시청해 주시는 이 나라 1200만의 우리 사랑스러운 불자님들, 그리고 오늘 일본에서도 7명이 왔습니다. 현지사 신도 분들입니다. 그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이 귀중한 시간을 부처님의 진정한 말씀, 위대한 불교를 여러분들한테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 세계인구는 70억 가까이 됩니다. 많은 종교집단이 있습니다. 수만(數萬)을 헤아리는 종교집단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많은 종교인구가 됩니다. 미국만 해도 5,000여개의 사교집단(邪敎集團)을 위시해서, 개신교만 해도 2만5천여 개의 종파가(교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만을 헤아리는 교단(종파)이 있습니다. 종교집단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이 약10억을 넘을 겁니다. 힌두교가 또 그렇습니다. 이슬람교가 또 그 정도 됩니다. 그런데 너무도 희유하시고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도는 아마 2, 3억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사실 불교는 역사가 2600년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성불하신지가 2600년 전이 아닙니다. 아주 옛적에, 무량겁 전에, 진묵겁 전에 이미 불과(佛果)를 이루신 어른입니다. 그 동안 사바세계에 많이도 다녀가셨습니다. 불교는 가장 우수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불교는 대단히 슬프게도 원형불교(본래의 불교)에서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너무 왜소화(矮小化) 되어있고, 너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이 법문을 수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 불과(佛果)를 이루신 2600년 전만 하더라도 종이도 없었고, 볼펜도 없었고, 녹음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 귀중한 말씀을 담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외워서 ‘아! 그것이 옳다’하게 되면 합송으로 내려갑니다. 모두 함께 외워요.

 

그렇게 하기를 부처님 열반 후 100년, 200년, 그때부터 이제 경전이 편집되어 갑니다. 여기서 많이 왜곡 됩니다. 인도라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방언은 1,600여 가지가 넘습니다. 중국도 심하지만 인도의 방언이 아주 심합니다. 그런데다가 불멸후(부처님 가신 후) 100년쯤 되어서 부처님의 교단이 상좌부(上座部), 대중부(大衆部)등으로 분열됩니다.

 

그로부터 100년간에 20여개 부파로 분열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사상은 왜곡되어 갑니다. 그 구어체인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정착하다가 보니까(문어체로 쓰다가 보니까) 왜곡 되고,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불교는 발전해 가는데,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부처님 가신지 200년 쯤 되어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3대왕인 '아쇼카왕(아육왕(阿育王))'이 출세했습니다.

 

그분은 최초로 전 인도를 통일한 대단한 불자였습니다. 아쇼카왕은 인도 자체는 물론, 지금의 이라크 이란 쪽의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그리스까지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그 이쇼카왕은 이제 보니까 어떤 붓다의 후신이었습니다. 부처님 이후 붓다의 후신이 열분 정도 오셨습니다.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의 덕분으로 그 당시 면면히 내려오던 브라만교(브라마니즘, 나중에 힌두교로 개칭함)를 누르고 불교가 전 인도를 석권했습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부처님 가신지 1500년~1600년 후, 아쇼카왕이 가신지 1400년 쯤 되어서 불교는 인도 땅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힌두이즘(힌두교)에 흡수되는 등, 어쨌든 간에 불교는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주목했습니다. 이 좋은 교리, 부처님 사상인 불교가 왜 망했느냐?

 

대학교에 가서 인도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불교가 망한 이유가 있습니다. 11세기에 회교군의 침입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만, 그보다도 정신적․사상적으로 힌두교에 눌려버렸습니다. 다시 부흥한 힌두교(브라만교)에 눌려버렸습니다. 그 인도사람들은 종교심이 대단히 강합니다. 브라만교는 범(梵)·아트만(atman)종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더 말씀을 해드려야 됩니다.


브라만교(힌두교)란 뭐냐? 이걸 이해하려면 간단하게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 태초(太初)에 우주에 변재(遍在)해 있는(우주에 충만해 있는, 꽉 들어차 있는)어떤 절대자, 이게 범(梵)입니다. 범(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아무것도 없는 태초입니다. 그 범(梵)이 스스로 자기를 전개시켜가지고 사람을 비롯해서 우주만물을 냈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그 범(梵)은 우주만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참 이상하고, 재미있지요?

 

이것이 만물을 냈으니까 질료인(質料因)이라고 합니다. 질료, 질료인(質料因), 원인이 되어요. 그리고 다시 들어가서 그것들이 모든 활동을 하여 업을 짓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냈으니까 그것을 동력인(動力因)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 개개인은 범(梵)이 들어갔으니까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범(梵), 아트만이라고 하는 개념을 알아야 됩니다.

 

이건 인도의 힌두교(브라만교)입니다. 이 브라만교에서 불교를 볼 때, 불교는 이러한 종교입니다. 인연소생 인연생기(因緣所生 因緣生起)를 이야기합니다. 인연소생(因緣所生), 인연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모든 역사는(모든 사건은) 인연으로 일어나 생긴다는 거예요. 이걸 연기법(緣起法), 또는 연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부처님께서 최초로 발견한 정말로 위대한 사상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벌써 많은 주장이 있었습니다. 범(梵)이 스스로 자기의 몸을 전개해서 만물을 냈다고 하는 것을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전변설(轉變說)'은 큰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전변설(轉變說)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우주에 충만해 있는 힘, 태초부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면서 우주에 두루 한 스스로 있는 자존자, 이것을 우리가 범(梵)이라 하고, 공(空)이라 하고, 일심진여, 진여불성(眞如佛性), 마음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잖습니까? 브라만교에서는 이것에다가 인격을 부여해줍니다. 거기서도(브라만교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격을 부여해줘. 그래서 범(梵)이 스스로 전개해서(활동을 해서, 몸을 뒤틀어서) 우주만물을 냈다 그거예요. 이걸 행위로 봅니다. 그것은 인격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나, 우리 불교에서는 그건 아닙니다. 이 자존자는(空은, 佛性은, 마음은) 어디까지나 비인격(非人格)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비인격입니다. 이것은 견성(見性)해보면 압니다. 우주본체를 보는 그 자리를 견성이라고 합니다. 본래의 마음, 우주의 근원적인 본체를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견성해 본 사람(견성한 사람)은 압니다.

 

뒤집혀가지고, 경계가 뒤집히더니 하나도 없어. 텅 비어있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텅 비어 있단 말이어요. 실체가 없더라 그거요. 가고 오고하는 것이 없어. 머물고 하는 것도 없어. 이것이 본체야. 이게 본체인데, 여기에다가 심하게 인격을 붙여가지고 인격신으로 화한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올 시다. 어쨌든 이건 인격이 아닙니다. 이건 비 인격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에다가 인격을 부여한 소위, 신(神)을 부정합니다. 자이나교도 그렇지만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신(神)을, 인격신(人格神)을 부정합니다. 비인격(非人格)의 원리는 긍정합니다. 비인격적인 원리, 이것은 긍정합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비인격의 그 범(梵)에서(자존자에서, 空에서) 현상세계가 어떻게 벌어져 나왔느냐?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든 것은 생기고, 인연 따라서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 연기의 법칙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성냥이 있습니다. 성냥을 그으면 어떻게 됩니까? 불이 일어나지요.

 

이거 한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그 일어난 불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불이 생겼습니까? 불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성냥이라는 것 하고, 사람이라는 것하고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이 공(空), 진여불성, 법성, 법신, 범(梵), 범(梵)이라고 합시다.

 

이건(이 곳에는) 모든 사물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성품이 녹아 있는데 예요. 불이라고 하는 성품이 상주생 상주멸(常住生 常住滅)이라고 합니다. 상주생 상주멸(常住生 常住滅), 불이라고 하는 성품이 이 우주 안에 가득히 있어요. 불(火)만 그러느냐? 물, 땅, 허공, 바람이라는 성품(지·수·화·풍의 성품)도 그래요. 이 우주 안에 충만해 있다 그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성냥개비를 가지고 그으면 불이 나온다 그거예요. 이 본체(우주만물)에, 우주 간에 이런 성품이 없으면(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어대도 불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알겠지요? 간단한 예를 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은 불과(佛果)를 이루지 않고는 알 수가 없어. 이것을 알 수가 없어요. 이 세상만물이 어떻게 생겼느냐? 다른 종교의 철학,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그걸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이것은 인간의 한계예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인격신을(절대자를) 딱 설정해 놓고 보니까 다 되어. 전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창조해버렸어. 엿새 동안에 다 만들어 버렸어. 이렇게 해버리니까 해석이 쉬워. 그렇지만 수십, 수 백 천 가지의 많은 모순이 옵니다. 모순이 있어요. 그러나 연기법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연기법(연기의 법칙)입니다. 창조론(創造論)이나 전변론(轉變論)이 아닙니다. 일단 그것을 아십시오.


불교가 망한 이유를 지금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조금 알아듣기 쉽게 말씀을 해드리는 거예요. 불교가 왜곡되지 않았더라면, 아쇼카왕이 저 너른 인도 땅을 전부 통일하고 페르시아까지 포교를 했잖습니까? 그 후에 우리 불교가 발전을 거듭했다면, 당나라 때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은 자연히 접수했잖아요(먹었잖아요). 서구라파, 미국까지도 가지 못했다는(갈 수 없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어요.

 

전 세계를 먹을 수 있었어요(접수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망했느냐? 재래불교에는 결정적인 흠결이 있습니다. 여러분, 듣고 싶죠? 불교를 사랑하는 여러분, 듣고 싶죠? 불교는 인연소생 인연생기, 연기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육도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렇지요? 여섯 세계를 업을 따라서, 지은 업에 의해서 여섯 세계를 가서 죽고, 여기서 나고 여기서 가고 죽고해서 여섯 세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윤회,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하는 그 비유가 맞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어떤 사람은 죽어서 하늘 간 분도 있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 분도 있고, 그러더니 사람으로 오고, 축생으로 오고, 사람마다 각각이기 때문에 윤회생사라는 말이 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중생은 육도에 윤회전생(輪廻轉生)합니다.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육도에 윤회전생(輪廻轉生)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심사상입니다.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이 그렇습니다. 육도윤회를 전생합니다. 이건 맞습니다.

 

그러면 육도를 윤회하는데, 불교에서는 무아설(無我說)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세요. ‘무아설(無我說).’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특색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삼법인(三法印)사상을 공부할 때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공부했을 거예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합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문제가 옵니다. 모든 사물을 봅시다.

 

이 세상 우주만물을 한번 봅시다. 여기에 놓여있는 컵, 책상, 마이크, 저기 보이는 산, 바위, 돌, 자갈, 땅, 별...등 이 모든 것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거예요. 그건 맞는 거예요. 인연 따라서 이루어졌어요.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알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요소가 모여진 것은 우리 눈에 보여서 이제 있다고 하고, 이 인연이 다해서 흩어져버리면 없다고 합니다. 공(空)이 되어버려. 전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요. 왜 그러느냐?

 

인연소생(因緣所生)이기 때문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요. 완전히 흩어져버리면 아무것도 없어. 실체가 없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실체가 없어요. 자아(自我)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 육신도 봅시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봅시다. 이것도 나(我)가 아닙니다. 이것도 나(我)라고 하는 실체가 없어요. 눈(眼)이 실체가 있으면 영원히(백천만겁을) 놓아두어도 눈(眼)으로 있어야 돼. 그런데 이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인연으로 모여졌기 때문에, 이것은 금방 없어져버려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의 이 컵도 흙하고, 물하고, 불이 모여서 된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이 몸뚱이를 봐요. 이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졌어. 그렇기 때문에 이것도 실체가 없어요. 죽어버리면 허망합니다. 다비(茶毘)해버리면 한줌의 흙(재)으로 되어버려. 허망해. 그런데 사람을 비롯해서 유정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색(色)이 있습니다. 지수화풍, 이것을 색(色)이라고 해요. 색깔, 또는 색(色) · 색대 · 색의 원소(요소)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묶어서 색(色)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정신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사람은 정신적인 것이 있잖아요. 그것을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합니다.

 

수(受)-받아들이고, 상(想)-받아들인 것을 생각하고, 행(行)-그것을 갖다가 정신적으로 행위하고, 식(識)-인식해(판단해). 정신(생각)이라는 것은 이런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하는 요소가 있어요(요소로 이루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五蘊)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색(色)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한다고 했지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온(蘊)이라고 하는 것은 '쌓임'이라는 뜻이어요. 쌓임, 과학에서 볼 때 산소라고 하는 원소는 산소원자의 집합이어요. 그렇잖습니까? 무수하고 동일한 산소원자의 집합이 산소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쌓인 거예요.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 그래요. 그래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오온(五蘊)이라고 그래. 사람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정신,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정신, 이것이 문제야.

 

유물론자들은,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뇌의 산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불교에서는 정신을 뇌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뇌를(육신을) 조종하는 주인으로 봐요. 안 그렇습니까?


이제 무아(無我)를 설명하는데, 여러분! 좀 지루할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들으세요. 인간은 오온으로 이루어져있어요. 그런데 그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문제더라 그거요. 이것을 실체로 볼 것인가, 이것을 실체 아닌 것으로 볼 것인가? 그런데 육도윤회를 한다고 하니까,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고 하면 주체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윤회하는 주체가 없이는 육도윤회를 할 수가 없어.

 

그런데 불교는 무아설(無我說)이거든요. 부파 불교에서 어떻게 이 생각을 실체로 안 봐요. 그러니까 부처님 멸후 100년 이후 20여개의 교파가 나누어져 버렸는데, 이 각 부파 불교에서 무아설(無我說)에 충실해야 되고, 육도윤회에 충실해야 되고, 그러니까 무아설 · 육도윤회 주체설이라는 두 가지에 모순되지 않도록 현학적 · 학문적으로 깊이 학승들이 연구를 한 거예요.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이 생각(정신)도 인연이 다해버리면 공(空)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공(空)으로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실체가 있어야 되겠다. 실체가 없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를 이야기한다고 하면 이거 안 돼. 힌두교에서 공격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힌두교의 여러 베다 학파의 학승들이 무아설(無我說)을 가지고 집요하게 공격을 했어. 그거 말이 되느냐 그거예요. 윤회를 하는데, 윤회를 하면 주체가 있어야 되는데, 이 몸에 주체가 없다고 하면 말이 되느냐 그거예요.

 

그래서 무아설(無我說)에 충실해야 되겠고, 윤회를 한다고 하는 윤회의 주체도 맞아야 되겠고, 그러니까 이것을 각 부파에서 연구해내기를(생각해내기를) 거듭했습니다. 어떤 부파에서는, 아마 '경량부(輕量部: Sautrantika)'일 것입니다. 소승불교 20부파 가운데 하나인 '경량부(輕量部: Sautrantika)'는 후세에까지 대단히 힘을 썼던(힘이 있는) 부파 불교인데, 거기서는 마음(생각)이 찰나생(刹那生)찰나멸(刹那滅)한다고 했습니다. 찰나생(刹那生)찰나멸(刹那滅), 앞생각이 없어지면 뒷생각, 앞생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뒷생각에다가 줘. 이렇게 이렇게 찰나생(刹那生)찰나멸(刹那滅)하는 심의 상속이론, 심-마음이 흐른다. 생각이 흐른다.

 

이것이 윤회의 주체다. 생각이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하지만, 이것이 물 흐르듯이 흘러. 촛불처럼 흘러. 초저녁 촛불, 한밤중 촛불, 새벽 촛불이 같듯이 흐름, 식(識)의 흐름, 이것이 윤회의 주체다 하고 나온 데도 있습니다. 여러분한테 소개해드리는 것은 재미있는 학설이 그렇다 그거요.

 

'포두갈라(podugla)', 한문으로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하는 윤회의 주체가 있는데, 그것은 이 몸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몸을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주체가 있다 그거예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하는 주체가 있다. 그래서 육도를 윤회한다 해가지고 '보특가라(補特伽羅)' 이론을 내놓습니다. 나중에 대승불교가 흥기해가지고 BC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용수 · 마명'이라는 걸출한 학승이 나옵니다. 거기는 공(空)·공(空)·공(空)했는데, 그걸 힌두교에서 볼 때에는 허무주의라고 그래요. 나중에 '무착 ․ 세친'이 나와 가지고 ‘아니다.

 

모든 우주 산물은 이 마음이 변형된 것이다. 식(識)이 변형된 것이다.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다’ 고 합니다. 힌두교에서 볼 때에는 이것은 대단히 관념론이어요. 이것은 사변론이어. 대단히 공허한 사변론이라고해. 힌두교 쪽에서는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무아(無我)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단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한단 말이에요. 앞의 '무착·세친'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내놓고 있어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면 모든 식(識)을 저장하고, 모든 식(識)의 정보를 저장하고, 신·구·의 삼업(업)의 종자를 저장하고 하는 식(識)을 말하는데, 그런 식(識)이 있다고 하여 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내놓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무아설(無我說)에 충실하려고 하니까 ‘상주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쨌든 간에 힌두교(브라만교)의 그 많은 학파의 학승들에 의해서 질타를 당합니다.

 

불교가 집요하게 질타당합니다. 그러면 인도국민이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라는 것을 다 듣는단 말이에요. 다 듣습니다. 인도국민은 전통적으로 범(梵)·아트만 사상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상에서 볼 때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인도국민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 모든 물상(물체)들은 인연이 모이면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진다’하는 그것은 이해가 돼. 그런데 ‘오온으로 이루어진 사람까지도 인연이 되면 다 흩어져버린다’고 해버리면, ‘내(我)가 없다’해버리면,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심각하게 들어보세요. ‘나(我)가 없다. 당신도 없어.’ 그렇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 그거예요. 말이 됩니까? 상식으로 볼 때 이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돼. 그래서 이제 불교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두 번째로 불교가 크게 궁지로 몰린, 불교의 교설이 크게 밀린 그 두 번째 문제도 있습니다. 그건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해서 불교는 인도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원리(이유, 원인)입니다. 이 무아설(無我說)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전을 한 번 들여다보자 그거예요. 경전을 들여다보면 인연소생(因緣所生)이 맞아요. 말이 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인연생기(因緣生起)도 맞아요. 그런데 유정, 사람에 와서는 이렇게 말해요. 눈은(눈도) 나(我)가 아니다. 입․귀․코도 나(我)가 아니다. 이 몸뚱이도 나(我)가 아니다로 나가요. 비아(非我)로 말해요. 이제 비아(非我)로 나갑니다. 비아(非我)를 말씀하셨어요. 곳곳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비아(非我)란 것은 뭐냐? 내(我)가 아니다 그거예요.

 

‘내(我)가 아니다’하면, ‘내(我)가 있다’하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내(我)가 아니다 하는 것은 내(我)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이제 현지사 불교사상이 나옵니다. 이 몸도 내(我)가 아니다. 이 생각, 앞에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했는데 약(略)해가지고 '생각'이라고 합시다. 정신, 생각. 이 생각이 내(我)가 아니어요. 왜 그러느냐? 이 생각은 시시각각으로 변해요.

 

안 그렇습니까? 일어났다 없어졌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합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 생각은 사실 진짜 내(我)가 아닌 거예요. 이 몸뚱이도 진짜 나(我)가 아닌 거예요. 이 몸뚱이는 100년 있으면 허물어져서 다 사대로 흩어져요. 한 줌의 흙으로 되거나 재로 됩니다. 안 그럽니까? 진짜 나(我)라고 하면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진짜인 거예요.

 

나(我)라고 하면, 내 몸뚱이라고 하면, 내 것이라고 하면 나(我)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돼. 병도 안 걸려야 되겠다고 하면 안 걸려야 돼. 그런데 이 몸뚱이가 병에 걸리잖아요. 나는 오래 살고 싶다 하면 오래 살아야 돼. 그런데 어느 날 밖에 나가서 교통사고를 당해가지고 갑자기 죽어버려.

 

이 몸뚱이는 진짜 나(我)가 아니어. 이 몸뚱이는 가짜 나(我)예요. 이것은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 생각도 그래요. 여러분, 이 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애들에게 ‘너 그런 짓하면 안 돼’라고 하면, 애들은 자꾸 안 된다고 하는 쪽으로 갑니다. 이 생각이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생각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我)가 아니어. 그건 맞아요. 그러니까 어디를 봐도, 사람의 어디를 봐도 나(我)가 아니어요. 나(我)가 없어.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나(我)가 없어.

 

그런데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는 말씀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공(空)에서는 무아(無我)다 그럽니다. 공(空)에서는 무아(無我)다 그러는데, 이 무아(無我)라는 말씀을 쓴 까닭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의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이 이건 꼭 알아두셔야 됩니다.

 

고통의 제거에 초점이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 사람들, 유정들의 고통 제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외도가 와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질문하면 묵묵부답으로 나가십니다.

 

 묵묵부답을 '무기(無記)'라고도 해. '무기(無記)'로 대답한단 말이에요. 요즘에 나도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대학생 등)이 찾아와서 ‘스님! 이 세계는 언제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된 것입니까. 이 세계는 언제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혹은 사람은 어찌해서 생겨났고, 남녀의 성별이 왜 거의 절반 절반을 이룹니까?’ 이런 식으로 묻는다고요. 이런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해요.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대답을 안 하셔요. '무기(無記)'로 응해버립니다. '무기(無記)'로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걸 십사무기라고 해요. 오직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은 고(苦)의 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고(苦, 고통)의 문제해결에 있어요.

 

고(苦),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그 설움, 고통이지요. 둘째, 온갖 질병으로 시달리는 것도 큰 고통이지요. 요즘은 현대의학으로 나을 수 없는 중한 병들이 많이 옵니다. 셋째, 비명횡사(非命橫死)입니다. 이런 죽음은 고(苦)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고통의 제거에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고, 당신의 법문을 듣는 사람에게도 저 사람의 고통을 내가 제거해줘야 되겠다. 이것밖에 관심이 없어요. 1차적인 관심은 그것 밖에 없어.

 

그래서 보면, 세상 사람들 거의 많은 수가 죽으면 지옥으로 간다 그거예요. 지옥을 가거나 짐승이 됩니다. 하늘을 가거나 사람으로 오는 경우는 100에 한 둘입니다. 이거 슬픈 일이어요. 지옥의 고통, 지옥의 수 등은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아주 많습니다. 낱낱의 지옥은 사바세계만큼 넓어. 그 각각의 지옥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차 있어요.

 

어떤 지옥은 그 받는 형벌이 상상할 수 없어. 이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짐승으로 와서 살 때의 고통은 얼마나 큽니까? 짐승이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칼로 목을 따거나, 혹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하고,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기도 하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기도 하지요. 이거 비참합니다. 짐승으로 한 생을 사는 것도 비참한데 죽을 때도 비참해. 나나 여러분은 절대로 지옥을 가서는 안 되고, 짐승이 되어서도 안 되고, 아귀세계에 가도 안 돼. 이걸 막아줘야 돼. 부처님의 관심사는 고통의 제거, 중생의 고통 제거에 있어요. 얼마나 자비하십니까?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중생들은 집착이 강합니다. 집착이 아주 강해.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 재물에 대한 집착, 권력․명예에 대한 집착, 이성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합니다. 이 집착 때문에 업을 짓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실 때 업을 짓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 집착을 떼어줘야 됩니다. 집착이 고(苦, 고통)를 낳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만 떼어 줘버리면, 이 몸뚱이에 대한 집착만 놔버리면, 나머지 집착은 자연히 떨어집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명예․권력에 대한 집착, 성에 대한 집착 등등, 이것은 지말적인 것이어요. 이 몸에 대한 집착만 떼어주면 돼. 그래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이것은 방편이어. 집착을 떼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무아(無我)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모든 개개물이 인연으로 되어있고, 인연 따라 흩어져서 없어집니다.

 

이것은 맞습니다. 맞는데, 인연소생 인연생기는 어디까지나 현상세계에 국한한 이야기 올 시다. 현상세계에 국한한 이야기예요. 이것을 저기 묘유(妙有) ․ 적멸(寂滅) ․ 본체의 세계까지 끌고 가면 안 돼. 그래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앞으로 스님이 매회 50분 씩 한 달에 두 번, 6개월 동안 하기 때문에 주~욱 해갈 것입니다. 이 위대한 불교가 세력을 잃고, 억울하게도 인도 땅에서 쫓겨나 설 수 없는, 그리해서 인도 땅을 버리고 나온 이유, 지금의 불교는 원래의 불교에 비해서 대단히 왜소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왜소화 되었어. 그 교리가 너무 왜곡 되었어. 그래서 스님이 감히 이 자리에 서서 6개월 동안 위대한 불교의 면목을 여러분한테 알려 드릴 겁니다.

 

▸이 무아설(無我說)과 윤회주체 간의 상관관계를 말씀드리고,

▸그 다음, 어떠한 종교도, 모든 종교의 종교라고 하는 힌두교도 알지 못하는 소식입니다. 그건 뭐냐? 힌두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끝납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친 것으로 해서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깨쳤으면 보림을 해야 돼. 우리 선불교(禪佛敎)에서 말하는 보림을 해야 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깨쳤으면 나(我)라는 착을 완전히 뗄 수 있어야 돼. 이제 떼어버려야 돼. 나(我)라고 하는 착을 떼어버려야 돼. 업장을 씻고 씻고 소멸해야 돼. 악과 습의 기를 뽑아버려야 돼. 그래야 완전히 해탈 되는 거예요. 완전히 해탈 했다? 아라한, 무루대아라한이 그래요.

 

거기가 완전 해탈한 자리예요. 거기에서 더 나아간 소식은 모든 종교가 깜깜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불교, 진짜 우리 부처님 불교는 깨달음 이후를 주~욱 말씀하십니다. 보살의 세계, 붓다의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많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겠습니다만, 정말 우리 본래의 불교로 우리가 복원해가야 됩니다. 본래의 불교로 복원해가야 됩니다.


50분이 거의 된 것 같습니다.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신 것은 방편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경에서 말씀했듯이 이 몸뚱이도 내 것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이 생각도 내 것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분명하지만, 진짜 주인공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그것을 진아(眞我), 앞에서 말씀했던 소위 자존자, 공(空),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은 맞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가지고 진짜 나(我)라고 안 합니다.

 

그것은 나(我)의 진짜 몸도 되고, 나의 근원, 당신의 근원, 저 모든 무정물의 근원도 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닌 윤회의 주체가 있습니다. 윤회의 주체는 찰나생 찰나멸하는 그 생각의 흐름도 아니고, 보특가라(補特伽羅)도 아니고,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아뢰야식도 아닙니다. 식(識)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는 몸뚱이를 지녀야 됩니다. 식(識)이, 영혼이, 혼이 몸뚱이를 지녀야 됩니다. 혼의 몸뚱이, 이게 윤회의 주체입니다. 이것을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영혼체'그럽니다.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가 됩니다. 몸뚱이가 있어야 됩니다. 사람도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으면 몸뚱이가 있어야 ‘야! 참 구경할만 하네’ 그런다고요. 이 몸뚱이가 있고 눈이 있어서 그런다고요.

 

이런 오근․육근이 있어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지옥에 가서 벌을 받는다? 벌을 받는 몸뚱이가 있어야 돼. 식(識)이 어떻게 벌을 받습니까? 몸뚱이가 받는다고요 몸뚱이가. 하늘(천국)을 가고, 극락을 가서, ‘햐! 행복하다’고 느끼는 식(識)의 몸뚱이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육근(六根)이 없이 육식(六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합해서 육식(六識)이 나오는 겁니다. 이 식(識)이 혼자 존립할 수 없습니다. 이 식(識)은 근(根)과 경(境)에 의해서 존립할 수 있는 거예요.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 지금 인도의 석학들이 모여 있다고 합시다. 좋소! 당신 말이 옳소!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소. 윤회의 주체는 영적 실체인   '영혼체'입니다. 그래서 영혼체의 설명을 앞으로 주~욱해 갈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지옥에 갔어. 그러더니 하늘로 천도를 해주니까 하늘로 가셨어. 그 몸뚱이, 그 몸뚱이가 가시더라 그거예요. 지금은 아버지가 성중하늘에 계셔. 그 하늘에 계시는 것은 그 몸뚱이에요. 얼굴만 조금 더 아름답고 청정하고 옷만 더 바꿔 입었지. 우리 아버지란 말이에요. 그 몸뚱이가 중요하다 그거요. 그 몸뚱이가 윤회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 몸뚱이 안에 식(識)이 있어. 8식이 있고, 식(識)이 다 있어. 그 몸뚱이는 불성을 지니고 있어요. 나도 불성을 지니고 있고요. 그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입니다. 그래서 ‘비아윤회설(非我輪廻說)’과 ‘유아윤회설’을 주장합니다. 이거 맞습니다. 만약 이러한 교설이 아쇼카왕 이후로 불교를 그렇게 선전했더라면 힌두교의 모든 국민들이 전부 흡수 되었을 거예요. 불교로 흡수 되지요.


그리고 모든 종교가 진짜 정법인 불교에 흡수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 시간에 주~욱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을 수 없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조금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함께 해주었기 때문에 이해하실 겁니다.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전국에 계신 우리 1200만 불자들에게 권합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하고, 염불을 하면 죽을 때도 편히 갑니다. 염불하고, 경전 읽고, 다라니를 하면 여생도 편합니다. 큰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염불하고, 경전 읽고, 다라니하고, 그리고 여러분이 지켜야할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면 여러분의 장래는 밝습니다. 다음생이 복될 것입니다. 그리해서 부처님공부를 하고, 부처님께 선근공덕을 짓고 하면 극락도 갈 수 있습니다.

 

스님 따라서 염불중에서도 염불이라고 하는 석가모니부처님 칭명을 하겠습니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구원실성 석가모니불...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고아일심귀명정례

 

작성자/허정(민병석)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