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
큰스님의 법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견성
의 의미부터 하나하나 이해해 가면서 본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견성이란 글자 뜻 그대로 성품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품이란 무엇일까? 성품이란 일심, 여여함,
본래 면목, 자성, 밝고 고요한 마음, 청정한 마음, 순수하고 명료
한 마음, 깨끗한 마음, 참 나 등등으로 언급되고 있
다. 사실, 사과는 깨물어봐야 맛을 안다. 그렇듯 견성은 체득해야
아는 것이다.
생각이나 사변적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해오
이지 증오가 아니다. 신비적인 체험으로 뚜렷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본마음인 성품을 철견하지 않는 이상 견성의 올바른
뜻을 해득 할 수 없는 것이리라.
견성에 대한 올바른 해의를 위해서는 오늘날의 '깨달음의 프레
임위크'에 근거하여 견성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
라 생각한다. 깨달음의 얼개 또는 틀 구조는 다름 아닌 견성이라는 깨
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은 고도의 난행고행, 각골정진으로 고도의 정신 세계로서의
승탑을 내면에 구축해 나가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리고 존재를 바라보는 인식의 대변환이 일어나야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일대 인식의 대변환을 가져오기 위해서,
즉 존재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있기까지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
만 큰스님 말씀대로 팔정도, 사념처, 칭명염불선 등을 대표적으
로 거론할 수 있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알
고 있어야 한다.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사상의 완벽
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비 체험을 해봐야 하며, 실재와
존재의 의미를 체득해야 한다.
또한 업연이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해야 하며, 중생심
과 청정심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타파해
야 한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빚, 죄, 악연, 습(기), (탁)기,
(집)착, 그리고 삼독심을 제거해야 하며 중생의 의미와 윤회해탈
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 필요하다. 물론 지옥이 존재하며 육도
윤회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선정과 삼매의 세계를
증득하여야 하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이원성을 해체할 수 있어야 한
다. 이를 위해서는 선, 교, 율 모두를 겸수하여야 하고
계. 정. 혜 삼학을 무엇보다 잘 도야해야 한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워내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하며 야망으로 표출되는 에고들을 올바르게 활용하고
무모한 관념은 타파하는 것이 요망된다.
견성을 보다 수행자적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수행자의 영혼이 일련의
시간적 공간적 상황들을 통과하여 자각의 눈을 키워나가는 과정,
즉 프로세스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영혼은 무수히 길
고 긴 영겁 동안 쌓아온 업장이 어는 정도 소멸되고, 습기
를 제거해 가며 빚을 청산하며 더 나아가 인연들과의 애증을 제
거해 나간다.
깨달음의 터널은 구도자, 불제자, 수행자의 통과 의례라 할 수 있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구도자는 인간 세상의 모든 허망한 맛을 겪게 된
다. 큰스님 말씀대로 세상이 무상하고 고,(괴로움)이며 무아
라는 것을 여실히 철견하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의미와 가치를 아주 뼈저리게 인식할 수 있는 가르
침들을 배우게 된다. 그것에는 주로 고독, 인내, 용기, 절제, 금욕, 자
비, 헌신, 희생, 이해, 용서, 겸허, 관용 등등의 덕목 등이 있다. 이러
한 덕목들을 하나하나 소양해 나가고 궁극적으로 마스터해 나감으로써
터널의 저 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뚜렷하게 빛나는 마음을 증득
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견성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견성을 했다고 해서 만현 큰스님께서 설하신 고대 근본불교 이
래로 은장되었던 미증유의 가르침, 즉 붓다의 삼신설로 알
려진 불신관을 얻는 것은 전혀 아니다.
불신과 견성에서 말하는 마음의 자성은 엄청나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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