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깨달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수행의 종착지가 아니다

불제자 2009. 11. 10. 22:11

 

 

 

 

 

 

깨달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수행의 종착지가 아니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견성, 즉 깨

달음만이 모든 문제의해결이 아니며 결코 깨달음이 수행의 마지막 종

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설파하셨다.

 

무엇보다 수행 중에 대적정삼매를 통과하여 무량광을 체험함

으로써 불신을 구족하여 생사관을 확립하는 것이 불제자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못한 채 상적광토에 법신을 그리고 연화장 세계에

원만보신을 얻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볼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사바세계의 무상함을 극복하는 길이며

이것이 바로 생사관 정립인 것이다.  이에 불제자는 무엇보다도 견성

이 곧 완벽한 생사관 확립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아야 할 것이

다.  그러므로 견성, 즉 깨달음은 수행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

야 한다.

 

여기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몸소 설하신 큰스님의 법설을 들어보자.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깨달음의 정의는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본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하며 일체우주 만물의 근원자리 법성이라 하는

그 자리를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경험상 그리고 많은 화두 타파한 분들의 이야기로 볼 때

부처님의 말씀으로 볼 때 그 깨달음의 경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됩니다.  하지만 그 청정 무구한 단계의 경계가 드러나게 되는 데, 그

경계가 드러나는 것이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한 식경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우리가 억겁을 통해 살아오면서 많은 업을 짓고,

따라서 습이 붙고 기가 생기고 그럽니다.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어야 계합이 되는 겁니다.  원래 생각 이전의

자리로 나가 뚫기는 뚫었지만 뚫는 것이 깨달음인데, 그 청정 무구한

본성과 나라고 하는 것이 계합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삼독심 모든 번뇌가 다 뿌리 채 뽑혀져야

합니다.  순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 습이나 기라든지, 나쁜 인연까지도

찌꺼기까지 완전히 소멸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이 종착점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이제 깨달

아서 나라는 생각을 죽이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걸 두타행이라

고 합니다.  가장 좋은 공부는 두타행입니다.  두타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권하는 것이 바로 두타행입니다."

 

또한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지요.  깨달음 이후에 보림

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경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본

성과 계합하기 위해서 삼독을 녹이고 습을 녹이고 기를 녹이려고 보림

을 합니다.  그러나 보림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정화는 일부 될 수 있

을 지언정 소멸은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깨달음은 그런 찌꺼기가 완전 불식이 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집착이나 상이 뚝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수행을

잘하다 보면 그 자리까지 갑니다.  아라한 자리.  그러나 보살이나

붓다는 결코될 수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명료한 가르침이신가?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