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불교는 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
-2500년간 잘못해석된 '무아無我'를 비판하면서
1. 무엇이 문제인가?
부파불교시대부터 지금까지 불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무아와 윤회주체"의 문제입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의 요지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나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무아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를 하려면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실체,본체)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의 무아이론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가 없다고 하니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이론과 윤회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한 가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아를 잘못 이해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잘못된 무아론을 전제로 윤회이론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윤회이론을 포기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을 양립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에서부터 논사들은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여러가지 이론들을 개발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른 바 무아윤회이론입니다. 이에 비해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면 유아윤회이론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대부분 윤회의 주체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심식류(心識類)의 어떤 존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부파불교시대의 근본식 사상(대중부), 푸드갈라 이론(독자부), 유분식 사상(상좌부), 세의식 사상(경량부)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후에 대승불교에 이르러 무착,세친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식이론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는 것으로 대체적인 결론이 나게 되고 이것이 지금 불교계의 대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 무엇이 잘못 되었나?
(1) 무아에 대한 잘못된 해석-무아(無我)의 정확한 의미는 비아(非我)
무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 몸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나의 실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현상계에는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없다” 라고 말하면 “무아(無我)”가 되고, 이를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아니다”고 하면 “비아(非我)”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아라고 하게 되면 나의 주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불교계의 무아에 대한 해석도 이런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비아”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나의 진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보다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생각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왜 무아라고 가르쳤을까요? 이는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너무나도 “나”에 집착하여 온갖 탐욕을 일으키고 그 결과 생로병사와 윤회전생의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무아란 가르침으로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여 고통에서 구제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2) 현상계에 국한된 무아 개념을 본체계까지 잘못 적용- 본체계는 아(我)
무아란 개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우주법계는 현상계와 본체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세계는 현상계입니다. 이에 대해 완전한 해탈을 이룬 세계를 본체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보살이나 붓다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무아라는 개념은 현상계에 국한된 말입니다. 이를 본체계까지 확장해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무아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현상계에 대한 본체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표현합니다. 열반에 따르는 네 가지 덕(涅槃四德)이라고도 말합니다.
현상계 본체계
제행무상(諸行無常) ⇒ 상(常)
일체개고(一切皆苦) ⇒ 락(樂)
제법무아(諸法無我) ⇒ 아(我)
번뇌오염(煩惱汚染) ⇒ 정(淨)
이렇게 서로가 대비되는 현상계와 본체계인데 지금의 불교계는 현상계에 한해 적용되어야할 “무아”개념을 본체계까지 적용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인 본체계의 “아(我)” 까지 부정해 버린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 불교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리도 왜곡해 왔으니 크게 반성하고 참회해야할 것입니다.
3. 무아 해석의 잘못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나?
(1)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는 무아윤회이론은 우주 이법인 인과법에 위배됩니다. 진리의 불교가 우주이법을 위반할 수 있습니까?
인연법(인과법)은 우주이법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육도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 또한 인생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착한 일 많이 하면 천상 등의 즐거운 세계로 가고 악한 일 많이 하면 지옥, 축생 등의 악도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행위를 한 자가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행위를 한 자와 과보를 받는 자가 확실하게 같아야 함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건입니다. 이것은 우주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동일성이 항상 보장되는 윤회의 주체 또는 본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이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윤회의 주체 없이 연기적 흐름으로 윤회가 가능하다는 의견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우주이법은 칼날같이 명쾌하고 분명하게 적용되는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윤회주체이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없는 식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된단 말입니까?
부파불교에서나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식(識)은 명칭여하를 불문하고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되려면 눈·귀·코·두뇌 등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식(識)자체는 그러한 기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식(識)은 우리가 신체적 기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 기관과 객관적 대상이 만나 상호 작용하여 생기는 것이지 신체기관과 독립된 식(識)이 따로 주체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간다면 내 몸에서 식(識)을 따로 떼어 감옥에 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도 아뢰야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지 아뢰야식 자체가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識)을 가지고 있는 주체가 바로 영혼체입니다.
(3) 윤회주체를 부정하면 영혼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영혼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문제 해결을 본질로 하는 불교의 존립기반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는 윤회주체인 이 영혼체를 부정합니다. 영혼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의 실체로서 본체계의 존재입니다. 인간문제 해결이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데 이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를 부정해 버린다면 불교의 존립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수많은 문제가 파생됩니다. 이 중차대하고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무아라고 영혼체를 부정하면 육도윤회도 해탈론도 사실상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존재이유가 있을까요?
불교 수행의 목적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통이 없는 해탈계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하는 주체인 영혼체도 해탈계로 가는 주체인 영혼체도 없다면 결국 육도윤회도 부정하고 해탈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수행하고 해탈을 이루려고 합니까? 대상주체도 없는데 말입니다.
나의 주체인 영혼체가 있어야 윤회를 하든지 해탈을 이루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6년 동안 그렇게도 혹독한 고행·난행을 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5) 영혼체를 부정하면서 천도재는 무슨 이유로 지내는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만 영혼체가 존재하나요?
최근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하는 어느 종단에서 발간한 금강경 표준해설집에서도 인간의 영혼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4상(四相)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 수자상을 영혼으로 해석하고 이 4상을 모두 극복해야할 관념이라고 말함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지옥 가는 주체도 짐승이 되는 주체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천도재를 지냅니까? 누구를 천도시키기 위한 천도재인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는 영혼체가 있고 그 외의 경우는 영혼체가 없는 것입니까? 필요할 때는 있고 필요 없을 때는 없는 그런 것이 영혼체인가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 극락왕생하라고 염불은 왜 합니까? 부처님께서 영산 당시에 목련존자 등 여러 제자의 어머니를 천도시켜 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런 모순들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6)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보살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요?
영혼체를 부정하면 본체계에 존재하는 실체를 부정하게 되므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계로 간 성자들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그 수많은 부처님, 보살님들을 부정하고 어떻게 불교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법화경과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엄청난 위신력은 모두 소설이나 비유로 본다는 말입니까? 특히 붓다가 되면 생기는 세 가지 몸 중 보신불은 네 개의 영체가 들어간 빛의 인격체로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하는 본불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공을 드릴 필요도 없고 예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7) 영혼체가 없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을 잘 섬기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예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제사 때 오는 영혼은 불교에서 말하면 저승에 못 들어간 영혼입니다. 무주고혼(귀신)이라고 합니 다. 따라서 영혼체를 부정한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8) 영혼체가 없다면 부모의 수정시 무엇이 육신을 받는지요?.
영혼체는 인연에 따라 부모를 찾아 수정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 식(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들어갑니다. 영혼체가 육신을 받는 것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세 개의 영혼체가 들어가고 가장 바깥 쪽에 있는 4번 영혼체는 모태 안에서 생깁니다. 태교의 대상도 영혼체이지 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체가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9) 영혼체가 없다면 어떻게 업의 주인을 찾을 수 있나요?
영혼체는 업을 가지고 다니는 주인입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업(業)을 가지 고 다녀야할 주인이 없어집니다. 업은 어디에 보관이 되고 그 주인은 어떻 게 찾을수 있나요? 부처님은 주인도 없는데 누구를 위해 업장소멸을 해 주시나요?
(10) 무아라 하여 열반하면“나”란 인격주체마저 완전히 없어진다면 누가 열반을 원할까요?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나요?
열반하면 우주 본성인 공(空)에 “나의 실체”까지 완전히 녹아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아이론이라면 과연 그런 열반을 하고 싶고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아올 수 있을까요? 영혼체가 없다고 하니까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11) 본체계의 아(我)를 부정하면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차원이기를 진정 원하는 것은 아니겠죠?
무아라 해서 본체계의 아(我)까지 부정해 버리면 불교는 왜소화 되고 다른 종교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육도윤회세계 뿐만아니라 아(我)의 세계인 해탈계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단순히 우주본성인 공(空)을 깨친 차원인 견성의 단계는 다른 종교도 다 말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정토계, 정토세계에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절대계는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본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이런 차원의 보살을 내고 붓다를 내는 종교이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공(空)과 100% 계합한 붓다의 차원에서만 창조주적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2) 영혼체는 해탈을 이룬 대성자가 볼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는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체는 우리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이룬 대성자들은 영혼체를 직접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영혼체와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성자들의 말씀을 믿고 영혼체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고 빙의된 사람도 볼 수 있는 이런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4. 힌두교와 기독교의 비판에 바르게 대응하지 못한 불교
(1) 힌두교측의 “무아” 비판에 잘못 대응한 것이 불교 쇠퇴의 한 원인
① 힌두교의 불교 무아이론에 대한 비판과 대응
힌두교측에서 불교를 비판할 때의 관점은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나 해탈을 성취하는 주체는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무아사상과 윤회주체와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비판에 대해 불교는 이 두 가지를 양립시키려고 온갖 이상한 논리를 동원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봐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엉터리 논리를 개발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합니다.
무아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론이라는 것과 윤회의 주체는 본체계의 영역에 속하는 영혼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나의 주체”가 없다면 누가 불교를 믿으려 하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불교가 서구로 뻗어나가 활성화 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교의 영혼체
힌두교에서는 범(梵)에서 우주만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범이 다시 개별적인 주체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범과 아트만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아트만은 범과 같으면서 개아(個我)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트만이 범(우주 본성)과 같다면 아트만은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업을 지을 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트만은 개별적인 자아로서 업을 짓기도 하고 과보를 받기도 하는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주체인 영혼체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개념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영혼체(4번)를 제외한 세 개의 영혼체(1·2·3번)는 영원히 죽지 않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 쪽에 있는 높은 차원의 영혼체(1번)가 인간의 본체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영체와 우주 본성과는 다른 개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육신에 존재하는 아뜨만을 바로 자신이라고 깨닫게 되면 이는 곧 범과 하나가 되어(梵我一如) 해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을 깨친 수준으로 해탈의 수준과는 또 다른 경지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해탈의 차원도 상당히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모르고 있다는 점은 힌두교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사람을 행위(業)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출신성분에 따라 고착화 시켜버린 사성제(四姓制)는 큰 잘못이라고 보겠습니다. 아울러 동물의 피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잘못된 의식입니다.
(2)“영혼은 없다”라는 당시의 잘못된 불교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기독교측과 영혼체 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잘못 대응한 불교
19세기 후반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에서 기독교측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교의 교리로 전제하고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당시 기독교측에서 윤회문제와 직접 관련지어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불교의 교리상에 영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세상에 알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 영혼체 논쟁에서의 우문우답(愚問愚答)에 대하여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측에서야 당시의 불교교리대로 질문한 것이니까 우문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정법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불교의 부끄러운 한 단면입니다.
5. 무아와 윤회주체 문제에 대한 결론
(1) 무아의 바른 정의는 “현상계의 존재인‘나’는 오온의 집합체에 불과하여 실체로서의‘진정한 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무아를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무아이론과 윤회주체 간에 모순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아(非我)의 개념에 보다 적합하지만 무아의 용어 속에는 현상계의‘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무아를 잘못 해석하여 본체계영역에 해당하는 영혼체까지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외도의 교설(敎說)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무아윤회설이라면 이는 우주이법인 인과법을 무시하는 대망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윤회설이 맞습니다.
(4) 생각과 판단을 하는 기능이 없는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식(識)의 주인인 영혼체 만이 윤회의 주체이고 동시에 해탈의 주체가 됩니다.
출처/현지궁 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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