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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사에 대한 조우석기자 컬럼을 한곳에

불제자 2010. 2. 22. 22:15

 

 

 

 

 

 

 

 

 

 

 

 

 

 

30년 토굴정진 하던 만현스님 성우스님이 TV법회로 끌어내
                                                                       ( 중앙일보, 2005. 11. 12 )

 

 

 

 

만현 스님(왼쪽) "한국 불교 오그라들어 화두만 알고 계율 무시" 성우 스님(오른쪽) "앞날이 안 보입니다 태풍 몰아쳐 주시길"


"우리 사회는 업장이 두터운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꼭 어두운 사회를 뜻하지는 않는 법인데, 잘 산다고 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밝다고 할 수는 없죠. 스님, 우리는 이를 씻어줄 한 줄기 법문, 참다운 도인(道人)의 등장에 목 마릅니다."(성우 스님) "침체상태인 한국 불교는 먼저 철저한 자기 갱신부터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계율과 함께 올바른 생사관 정립이 시급합니다."(만현 스님)

11월7일 오전 11시 서울 봉천동 불교TV 회장 집무실. 'TV법회' 녹화차 서울을 찾은 춘천 현지사의 만현 스님과 성우 회장스님이 무릎을 맞댔다. 좌담은 불교TV의 10년 장수프로 'TV법회'가 9월부터 방영 중인 만현 스님의 1년 릴레이 법회가 큰 반응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방송사 측은 'TV법회'는 대개 100만 명이 봐왔는데, 특히 릴레이 법회의 시청자는 평소의 두 배에 이른다고 밝혔다. 성우 스님의 표정이 환하다.
"만현 스님의 릴레이 법회는 9월 첫 녹화 때부터 부산 등 지방에서 버스를 빌려 올라온 불자들로 방청석이 초만원 입니다. 교수.의사 등 엘리트 불자도 상당수죠. 전에 없던 일이라서 저도 놀랍니다. 지난 6월 제가 춘천 현지사를 찾아가 '스님, 한국불교는 앞날이 없습니다. 태풍을 몰아쳐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고, 만현 스님이 어렵게 승낙해 주셨는데,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기쁩니다."

성우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는 침체 상태라고 규정했다. 태풍이 대기순환을 돕듯 만현 스님의 대중 법문은 불교 갱신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거듭 표시했다.

만현 스님은 1970년대 총무원 포교부장, 불교신문 사장을 지낸 뒤 30년 가까이 모습을 감춰왔다. "모자란 공부를 더하려고" 토굴 정진 등 수행에 전념해 왔다. 예전의 법명(법성 스님)도 바꿔버렸다. 그 결실의 하나가 5월에 펴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지금까지 3만 권이 팔리며 불교서적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성우 스님의 제의를 받고, 지금 내가 세상에 나갈 시기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새로 마련된 법상(法床)에서 던지는 제 법문의 핵심은 올바른 수행관과 생사관의 정립입니다. 화두 타파.견성(見性)은 수행의 첫걸음에 불과한데도 막상 그 뒤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계율을 무시하는 태도는 큰 일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라면서 '법화경' 등 경전에 엄연히 언급된 지옥.극락도 무시하는 짧은 인식 때문에 생사관도 흔들립니다."

만현 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래 세계가 아닌 '마음 종교(心敎)' 정도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선종.교종.밀교가 축소일변도로 뒤섞인 현재의 통(通)불교를 전통인 양 고수하는 것도 문제라고 일갈했다.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씨가 지옥과 극락은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불교를 능멸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구업(口業)의 극치 아니던가요. 이런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는 불교계가 답답합니다. TV법회에서 이런 점을 차례로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성우 스님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한국 조계종의 대표적인 율사(律師)로 꼽히는 성우 스님은 "TV법회는 올해로 10년을 맞는데, 그동안 석주.서암.성철.혜암 큰스님 등의 법문이 차례로 소개됐다"고 말했다. 만현 스님 릴레이 법회는 내년 8월까지 계속된다. 달마다 법문이 바뀌며, 매달 첫주 화요일에 새 내용이 선보인다.

글=조우석 문화전문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불교 교양지   禪 文 化

 

 

2005년6월호

우리시대 선승을 찾아 - 현지사 만현스님

 

 

한국 불교, 자기 갱신 없이 앞날 없다

-법문집 "21세기붓다의 메시지"에 나타난 만현(滿顯) 스님의 법 세계

조우석(중앙일보 기자)

 

 

 

 

우리가 덕담을 겸해서 던지곤 하는 한국 불교에 대한 호의적

평가란 대강 이쯤 된다.  "고대 이래 10세기 넘는 지금까지 동

북아시아 선 불교의 수행 전통을 간직하고 있고, 특정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우리 기층문화의 소중한 유산."

 

사람들의 평균적 인식을 반영하는 이런 평가에 단골로 따라

붙는 메뉴는 또 있다.  통불교라는 자랑..... 선 수행을 중신

으로한 종풍에다 교종과 밀교가 두루 포함된 불교 백화점이라

는 주장이다.  이런 통념이 분명 검증된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종종 턱없이 비약과 함께 '기분'에 취한다.

 

"이웃 궁국은 문화혁명 이후 망가진 자기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한국 불교를 배우려고 유학생 파견하고 있잖아. 일본 불

교? 그들은 스즈키 다이세츠 이래로 '학문화된 불교'라서 선 수

행의 전통은 부실하다고 봐야지. 서구 사회가 1868혁명을 전후

해 불교에 괸심을 가진 게 벌써 수십 년인데, 불교 세계화의

이 시대에 한국 불교의 전망은 좋다고 봐야지."

 

과연 그럴까?  의심받지 않은 진리란 썩기 마련인데, 1천 년

전통의 한국 불교는 과연 건강한가?  조선조 때 권력에 의해 강

제로 선종과 교종이 합쳐지고, 이후 축소 일변도로 흘러와 조

선 중기 이후 지금까지 정말 필요했던 자기 갱신에서 한참 멀

었던 역사를 막연하게 '통불교'라고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닌가?

 

9세기 중국 고대의 당나라에서 시작된 선 불교란 본디 인도

불교와 중국 문화, 도교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제3의 변용인데,

그 조사선만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불교 패러다임의

전부일까?  혹시 조사선이란 오랜 동어반복의 과정 속에서 많이

진부해지고 활력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한국 불교의 역량이 만천하에 유리알처럼 들여

다보이게 된 이 시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21세기 초입의 지

금 시대란 불교가 고대나 중세 때와 또 달리 '전 지구적 종교'

의 차원으로 대두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 앞서 티벳 불교나 남방 불교, 여기에 위빠사나

선 등이 서구에 먼저 소개됐고, 영향력 역시 한국 불교에 비해

크다.  티벳 불교 들이 '속이허한' 한국 불교에 여수입된 지도

10여 년이 됐다.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포함해 불교 관

련 영문 저술의 번역물이 독서 시장에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

다.  급한 마음에 사람들은 미국 명문대 출신 제자들을 길러낸

숭산 스님의 업적을 들먹이지만, 그건 외려 서구 콤플렉스를

반영할 뿐이다.

 

서구사회가 그들 언어로 노자의 <<도덕경>>이나 공자의<<논

어>>등 동양고전들을 휼륭하게 번역해 온 역사가 이미 2백여

년이고, <<법화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의 번역 역시 우리를

앞선 지 오래라는 점도 이미 상식이 됐다.

 

선 참구 수행만이 정통이고, 나머지는 속 좁게도 외도로 내

모는 이 와중에 '동북아 선 불교의 본거지'라는 덕담 혹은 자랑

이란 철모르는 소리가 아닌지를 되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다.

 

 

 

 

 

한국 불교는 우물 안 개구리? 

 

한국 불교에 대한 이런 의문 속에서 만난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자재 만현 스님 지음, 현지궁 현지사 펴냄)는 예사롭

지 않았다.  고백컨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앞서 필자가 언급했던

오랜 의문에 일정 부분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법문집은 지금 한국 불교계의 오랜 '관습화됀 유산'을

뒤흔듣다.  가히 파천황이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 불교의 정체

성에 대한 도전이고, 자기 갱신을 요구하는 사자후'에 다름 아

니었다.  <만현 스님과 인터뷰 참조>

 

"한국 불교가 천 년 넘게 선 불교 영향을 받아서 많은 불자

들의 인식이 고착돼 있음을 잘 압니다.  선종과 대다수 불교학

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마음을 깨치면 부처'라고 해

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견성이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부처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 나라의 불교 가르침은 많이 왜곡돼 있습니다.  교학의 바탕

이 되는 불교 경전 공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11족~12쪽)

 

만현 스님은 화두 참구 일변도로 진행되어 온 지금의 한국

불교 수행 방식에 '노!'를 분명히 하는데, 내가 보기에 만현 스

님의 이런 문제 제기는 지난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의 돈점노쟁과 일단 비견할 만하다. 아니 그 위력은

크게 앞선다.  20년 전의 돈점논쟁이 한국 불교 정체성 자체는

피해간 데 비해(아니 고착시킨 데 반해), 만현 스님 쪽은 훨씬 근

본적인 문제 제기로 시종한다.

 

이 점을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내 문제 제기

는 불교 교학 발전의 한 획을 긋는 일"(13족)이라고 밝히고 있

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되는 자신의 법문은 먼 훗날

평가받을 것"(166쪽)이라는 발언도 던져 놓고 있다.  어쨌든 간에

만현 스님의 발언은 "불교사적으로주목할 만한 큰 사건"(156쪽)

이면서도 지금의 한국 불교계에 뜨거운 메시지다.  무엇보다 현

재의 한국 불교는 정연한 체계를 갖춘 정통 불교가 아니라 심

교, 즉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우선 강

렬하게 눈에 뜨인다.

 

왜 그럴까?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법화경>> <<화엄경>>

등을 잘 읽으려 하지 않으니 교학에 어둡고, 거기에 나오는 생

사관을 포함한 핵심 교리들을 방편설 정도로 치지도외하는

몽매한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법

문집은 '우물 안 불교'에 대한 정문일침이다.  자기의 오랜 수행

이력의 내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당당하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계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지옥과

극락을 마음 안에서만 찾으며 그것(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마음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옥, 극락, 부처와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40쪽)

 

"선은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 정도로만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옥이란 것도 우리 마음의 산물로 (가볍게)

봅니다.  서방극락 역시 우주생명의 근원적인 바탕 정도록 봅니

다.  ----- (이런 식의 소박한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정의사회를 구

현할 때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비약으로 연결됩니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말도 우주 생명을 의인화한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92쪽~193쪽 요약)

 

만현 스님은 이 같은 법설이 정법을 능멸하는 외도의 설이라

고 단언한다.  이를테면 선 불교 쪽에선 <<법화경>> 속에 등장

하는 족쇄, 독충, 귀신 등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해 왔다.  대

중교육을 위한 서적 상상력의 장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법화경>> 11장 <견보탑품>, 15장 <종지

용출품> 그리고 16장 <여래수량품>, 등의 위대한 메시지를 

건성으로 읽고 만다.

 

 

 

 

법신에서 보신 개념으로 대전환

 

 

그러면 만현 스님 법문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신

개념 위주의 불교'에서 보신개념 위주의 불교'로 대전

환일 것이다.  보신 개념으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

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말대로 필자는 그런 불교관을 불교 세

계의 새 패러다임 도입과 구축 노력이라고 보는 쪽이다.  대승

경전에 나타난 핵심 정보와 사항이 새롭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읽어보자.

<<법화경>> 16장의 경우, 부처는 "나의 말은 진리이므로, 나

의 말을 믿으라."는 권면으 세 번 되풀이한 뒤 자신이 지난 40

년 간 이 땅에서 설법을 했던 '역사 차원의 석가모니'가 아니

라, 백천만 아유타겁 동안 이미 부처였다고 설파한다.  즉 절대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부처라는 점을 언명

한 것이다.  따라서 2500년 전 출현한 석가모니란 중생을 위한

현현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당시 제자들은 일상의 차원에 갇힌 채로 부처님 말씀에 그저

당혹해 한다.  11장 <견보탑품> 에서 현실의 이 땅인 영취산

바로 그 자리에서 다보탑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오른다.  더욱

놀랍게도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는 곳마다 나타나 부처님의 법

문이 옳다고 증명할 것이라 맹세했던 '다보여래'가 그 곳 다보

탑 안에 들어 있었다.

 

장려한 불국의 장면, 즉 절대세계의 자세한 모습까지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보여줬다.  심지어 제자들 앞에서 석가모니는 다

보여래의 옆 사좌좌에 않아 보이기도 했다.  이야말로 역사 차

원의 이 시공간에 연출해 보인 궁극적 실재, 즉 절대세계의 돌

연한 출현이고, 궁극적 실재와 역사적 석가모니가 하나임을 보

여준 위대한 기적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는 이런 정보를 시적인 상상력으로 읽어

왔다.  대중 교화를 위한 방편설로.... 즉 추상화 내지 관념화

시켜서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자재 만현 스

님의 개입이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인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부처님 세계의 구체적인 묘사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불교 세계관을 특징짓는 철두철미한 보신 중심주

의의 등장이다.  무량광으로 된 보신, 절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보신을 중심축으로 해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법신은 비로자나불로 상징되는 빛 그 자체, 진리 그 자체

혹은 우주 그 자체를 말하는 '우주적 몸'.  따라서 보신과는 불

이의 관계인데, 보신은 이 법신을 근거로 해서 나온다.  다

르게 말해 보신은 궁극적 절대계에 존재하는 불신의 구체적인

모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불교학자의 책상머리 발언이 아니고, 독

자적인 수행론과 불교 생사관의 정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또 만현 스님의 수행 과정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 문제의

보고서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때문에 만현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타파, 즉 견

성을 둘러싼 새로운 해석부터 정면에서 문제 제기하고 있다.

 

흔히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하지만, 만현 스님은 이를 철두철

미 부정한다.  한 마디로 "위험한 표현"일 뿐이라는 지적이

다.  외려 견성은 기나긴 수행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만현 스님은 자신의 수행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즉

화두 타파로 인한 마음자리를 깨치는 순간 하늘과 땅의 경계가

확 뒤집힌다는 것, 바로 이때 "내 앞의 모든 게 공이요, 나도

없고 나라는 생각까지도 사라진" 자성광명을 본다.

 

생각 이전의 본래 진면목이다.  이때 몸뚱이라는 것이 '가짜 옷'

이고, 나라는 것도 '가짜 나'이며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대목부터다.

 

그 견성의 단계가 완전한 깨달음이고, 따라서 생사윤회를 벗

어나 삼계를 완전히 뛰어넘기에는 턱없는 것

이라고..........., 이 대목에서 만현 스님은 논리와 문자에 굳이 매

달리지 않고 화두 타파 뒤 선정에 들었던 상태의 경험을 털어

놓고 있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선정 속에 몰입했던 때, 한 이불 속에서 심한

문둥병 환자와 함께 밤잠을 자게 되었다.  이런 선정 속 상황에

서도 만현 스님은 문둥이의 존재가 자꾸 의식이 됐다.  또 토굴

에서 보림하던 중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다가올 때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땀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연히 보게

된 미모의 여인을 보고도 마음이 설레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

대로 "(그런 자신이) 역겹고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화두 타파와

선정이 부처님이 말한 진정한 삼매의 경지가 아니었다는 중간

결론을 만현 스님은 그때 내리게 된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란 용광로에 무명 번뇌나 업장 따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지난 날 "나의

법문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진

여자성을 보았다 해서 곧바로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

았습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뵙고자 했으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

옥, 천상도 관할 수 없었습니다.  도솔정토나 서방극락도 끝내

관할 수 없었습니다.'(26쪽~29쪼 요약)

 

선승인 그가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 때

문이다.  이 방향 전환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사건임에 분명

하다.  염불선.  그것은 조사선 일색의 한국 불교에서 오랫동안

외도로 치지도외 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현 스님은 염불선

이 인도의 용수와 마명, 중국의 혜원, 선도와 각현 그리고 한국

의 의상과 원효 스님 또 서산 선사 등의 수행법이기도 했음을

주목하고 "침묵 속의 정토업을 쌓는" 수행을 거듭했다고 밝힌

다.  가히 놀랍다.

 

 

 

 

염불선이야말로 수행의 으뜸  

 

이런 용기는 <<화엄경>> <<법화경>> <<율장>>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는 수행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시절의 그 일이 놀랍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 스스로의 수

행인 자력에 의존하는 것에 일정 부분 한게를 긋고 있다

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타력에 의존하기 시작

한 것이다.  다음 그의 고백을 유심히 음미하기 바란다.

 

"덕산의 30방을 흔들며, 상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을 읊

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 된 양 착각 하며 오만을 떨었던 지난

날을 생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총무원 상임포교사로 법상에 앉은 지 2~3년이 못돼 나

의 공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25쪽)

 

바로 이 지점에서 고유의 불교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다.  그의 단언에 의하면 출가자가 자력의 수행으로 오를 수 있

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까지다.  즉 곧바로 성불한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다.  견성 그 이후부터는 철두철미 부처

 

님의 가피가 필요하고, 다음 생애에 몸을 받은 아라한의 공덕

이 다시 쌓여 그 결과로 보살의 반열에 오른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관음보살께서 뿌리는 부처님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는 위

력"이 바로 보살의 경계다.

 

이때 모든 보살이 아닌 최상수 보살 정도가 되면 부처가 뿌

리는 무량광이라는 빛덩어리를 보게 된다.  다음이 부처님 친견

의 경지다.  즉 '불과를 증한 대성자'의 단계에 바로 이때 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불신을 절대계의 부처

님 나라에 둔, 즉 법신 보신 화신의 3신을 완벽하게 구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높디 높은 까마득한 위계의 관문 때문에 '견

성 즉 성불'이라는 습관화된 말은 턱없는 노릇인 것이다.

 

"무량광을 보기 이전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범부가 지껄이는 망언일 뿐입니다."는 단언(35쪽)은

여기에서 나온다.  만현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삼신 이론과 부

처 성불 단계론이 11세기 티벳의 전설적인 성자 미라래빠보다

구체적이며, <<반야경>> 등에서 설명된 법신 이론 중심의 부처

설명보다 정교한 것이라고 밝히지만, 지금 이 원고는 그걸 검

증할 수 있는 자리는 안 된다.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인도의 용수와 달리

만현 스님 자신은 이 책의 도처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말하

지만, 그것 역시 제3자가 쉽게 용훼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이의 입장에서

보건대 만현 스님의 이 '신 불교론'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불교

가 훨씬 불교다워진다는 점이다.  장려한 체계의 구축과 함께

그가 강조하는 신행 활동의 3박자인 염불 - 계율 - 효도는 출

가자와 불자들을 위한 덕목으로 돌연 떠오르게 된다.

 

장려한 체계라 함은 수행의 단계와 관문만이 아니라 올바른

생사관을 위해 필수인 대목이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은 부처와

보살이  보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

회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마음자리를 깨친 정도의

수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장보살본원경>>에 설명되는 끔

찍한 무간지옥은 실제로 있다.  따라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가

설혹 선근공덕이 있어 견성했다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을 경우

특히 음행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유컨대 "수행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행위란 마치 깨끗한

물 한 컵에 똥물 한 방울이 떨어져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되

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소유와 청정을 지향할 것을 권한다.

 

이 점 요즘 흔들리는 모습의 불교계에 중대한 암시가 될 것이

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망언을

했던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역시 가슴 철렁할 노릇이다.  책

에서 만현 스님은 부처 말씀을 인용하며 "정법을 비방하는 구

업은 그 어떤 죄업보다 지중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만현 스님 설법에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삼신을

두루 갖춘 부처의 위신력에 대한 강조다.  훌륭한 상모와 지혜

그리고 자비와 신통을 두루 갖춘 부처는 온 세상에 자재한 존

재로 성큼 부각된다.  만현 스님이 화두 참구에 앞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 공부를 "가장 훌륭한 수행법"(208쪽)으로 권

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붓다 중의 붓다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은 바로 염불선입니다.

위빠사나선도 2500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공부이기 때문에 훌

륭한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는 것이요. "지장보살, 지장보살'해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칭명염불이라고 합

니다."(208쪽)

 

 

 

신 불교를 대망한다

  

앎이 짧은 필자같은 이가 불교 교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지도

모르는 만현 스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다.

 

그러나 그와 우리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느낌으로 말하건대 만

현 스님의 법문은 분명 경청할만했다.  현재 한국 불교의 내용

없는 동어반복의 와중에 감로수를 마신 듯한 느낌 또한 들었

다.  일본 인문학의 젊은 거물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주오대)가

"일본 불교는 에도시대 들어 창조적인 힘이 멈춘다."고  비판(<<

불교가 좋다>> 133쪽)했지만, 내가 보기에 조선조 중후기 이후 한

국 불교는 자기 갱신 능력에 문제가 있어 왔다.

 

지난 5월 현지사를 찾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은 산 정상

에 올라 보면 앞과 뒤의 정경이 보입니다.  산 중턱에 서서 보

면 시야가 가려 겨우 일부분만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발언이 갖는 주관적 측면에 대한 위험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은 정작 따로 있다.  <<21세기 붓다의 메

시지>>는 그동안 천 년 넘게 관습화된 수행법과, 선명치 못할

뿐더러 주요 경전들과 따로 노는 생사관에 대한 휼륭한 대안이

자 해석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만현 스님의 발언은 현재의 조계종이라는 틀보다는 정토종에

가깝거나, 아니면 그런 저런 구분을 떠나 '신 불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이름이야 어떻든 간에 포스트 모던의 이 시대에

불교는 능동적인 자기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현 스님의 법문은 '딿아진 이름' 조계종, 아니 한국 불교의

문패를 벗어나 '불교 문예부흥'의 참신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인터뷰-

 

 

"1973년 전남 함평 태생. 1960년 부산에서 출가(당시 법명

법성)한 뒤 조계종 총무원에서 포교부장과 상임포교사 활동. 서

울 연화사 주지와 해동불교대학장 역임. <<화엄경>>의 선재동자

처럼 여러 신지식을 두루 참방하였으나 뒤에 염불삼매로 부처

님 친견....."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책 날개에 보이는 자재 만현 스님

의 이력의 일부이다.  최근 몇 년 새 <현대불교신문> <대한

불교신문> 등과 불교TV 등 미디어를 토해 법문으로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는 만현 스님을 필자는 지난 5월 중순 춘천 현

지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1970년대 청담 스님을 모시

고 총무원을 이끈 뒤 돌연 은거 수행해 온 그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스님의 생각이 이토록 새로운데, 차라리 창종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도 포함돼

있다.

 

스님의 법문은 가히 파천황으로 시종하지만, 화두 타파와 견성은

수행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말씀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정통 조계종 사람입니다.  크게 이름을 내지 않으셨지만

대단한 율사였던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요.  석암 스님은

뒤뜰에서 멸치 한 마리를 먹는 것도 금기를 삼으셨던 분인데,

그 어른의 입적까지 10년을 시봉하였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 '이뭣꼬를 붙들고 전라도의 토굴에

서 참구를 했습니다.

 

 

자, 중요한 질문입니다.  간화선에 대한 회의는 어느

때부터 들었습니까?

 

밝히지만, 화두 타파를 했던 초창기부터 그랬습니다.  견성이

란 것이 미약했고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염불선으로 돌

아선 것도 그런 배경입니다.

 

 

본래 법명이 법성이었는데 세상에 나온 지금은 법명도 바꾸고

하실 말씀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더 휼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는 원력이 컸습니다.

 

요즘은 밀교, 위빠사나, 남방 불교가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이지

만, 부처님이 직접 가르친 그런 수행법을 외도로 치고 경전을

가볍게 여기는 절 분위기에서는 수행이 어려웠습니다.  화두 타

파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에 나 혼자 염불선에 전념을

했습니다.

 

 

책을 펴내기 전 몇 해 전부터 <대한불교신문>에 연재도 하시고 하는데

지금의 불교계에서 이렇다 할 반론 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묵묵부답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많큼 불교

계의 공부가 안 돼있고 또 내 책의 깊이 때문에 손 쉬운 반대

의견 제시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현 스님의 불교관이 이처럼 현재의 불교와 많이

다른 상황이라면 창종도 생각 못해 볼 것이 아니겠습니다.

 

......... 장종을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고려 중입니다.  그러나 그

래도 부처님의 정법에 근접해 있고 계율에 신경 쓰려는 종단은

현재의 조계종이라는 저의 판단도 동시에 밝혀둡니다.

 

 

 

송구스런 질문입니다.  책에 보면 만현 스님이 아난 존자의 후신이라고 쓰

여 있습니다.  또 수행일지를 보면 부처님 친견을 했다는 말도 거듭 나옵니

다.  이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까요?

 

제가 친견을 한 부처님의 말씀이 그러할 뿐입니다.  단 그것

은 밀장이기도 하니 여러분 앞에서 증명해 보일 수 없습

니다.

 

 

사실 얼마 전 입적하신 청화 스님께서도 염불선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우 좋은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

는 칭명염불과는 조금 구분되는 '실상염불'이지요.  실상염불은

모든 것의 근본 자리 곧 진여(실상)를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로 보고 그 실상의 대명사를 부르는 염불입니다.  저의 염불은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는 부처의 존호를 부르는 칭명염불입니

다.

 

 

-스님 지금까지 좋은 답변 고맙습니다.-

 

 

출처/ 선문화 38쪽~49쪽

 

 

 

 

 

 

 

한국 불교 올바른 생사관부터 정립을

-자재만현스님의 법세계를 다시 본다.-

 

조우석(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본지 6월호에 만현스님의 인터뷰가 나간 뒤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현스님의 법세계를 살펴보는 글이다.


"사체(死體) 부패의 첫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 분해, 즉 자기 소화이다. 인간 세포는 효소를 이용해 활용이 가능한 분자 단위로 쪼개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포의 통제를 받던 효소들은 이제 아무런 제한없이 세포를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 사체 안에 있는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일부 박테리아들은 그 액체를 타고 둥둥 떠다니며 사체의 머나먼 변방으로까지 이주한다. 어디를 가도 박테리아가 가득하다. 이제 무대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바로 팽창 단계다. 박테리아가 우리를 먹는 과정에서 가스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기는 과정이다.

이른바 정상적인 소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장 가스(방귀)와의 차이점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그 가스를 밖으로 내보내지만, 죽은 뒤에는 위 근육이나 괄약근이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배가 팽창하는데, 박테리아가 그중 많은 복부가 가장 두드러지게 부풀어 오른다. 다른 부분에서도 팽창은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은 입과 성기. 남자일 경우 음경과 고환이 대단히 커진다. 그렇다. 멜론 정도의 크기일까? 사체 부패 2주 정도가 지나면 유충들의 크기가 예전의 쌀알 크기에서 밥알만하게 커진다.

유충들이 우글거리는 소리가 사체에 한두 뼘 이내로 머리를 바짝 들이밀면, 뭔가 소리가 들린다. 유충들의 사체를 갉아먹는 소리. 내 곁을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주던 연구원이 알려준다. '꼭 뻥튀기를 갉아 먹는 소리죠' 간혹 몸통 자체가 터지는 때도 있다고 한다. 다시 연구원이 설명해준다. '그 때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게 해서 3주 정도가 되기까지는 장기의 잔해를 분간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수프처럼 된다. 영락없이 노란색의 닭고기 수프다."


어느 서구 지식인의 구상관(九想觀) 하나


마음공부를 위한 불교의 관법(觀法)에는 자비관도 있고, 수식관도 있다지만, 앞에 인용한 글도 훌륭한 관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구상관(九想觀) 혹은 백골관(白骨觀)…. 읽기 거북스럽다는 첫 느낌 따위는 중요한 것이 결코 못된다. 이 글은 서양의 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미국 테네시대학의 메디컬센터 안에 있는 인체 부패를 연구하는 시설을 꼼꼼히 둘러본 뒤 쓴 냉철한 보고서의 일부다. 지난 해 나온 책 『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치 지음, 파라북스 펴냄)의 한 대목인데, 저자 특유의 쿨한 유머 감각이 놀랍고 리얼한 묘사 때문에 그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저자는 때로는 불교 경전 『염처경』을 들먹인다. 그것이야말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인간의 신체라는 것, 그리고 오온(五蘊)의 변화에 다름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실한 관심이리라. 서구사회의 지성들은 이제 동서양의 핵심 고전들에 아무런 편견 없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사관을 정립하고 있는 중이라는 좋은 증거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다. 생사관,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선문화』 6월 호에 나는 자재만현 스님(춘천 현지사)의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소개할 기회가 한 차례 있었고, 현재의 조계종단에는 파천황(破天荒)의 문제제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그 스님 특유의 법 세계를 의미있게 일별해본 일이 있다.

당시 현재의 한국불교의 상황과 인식의 측면에서 그토록 생각과 법 세계가 다르다면 "창종(創宗)을 못할 것도 없다"는 만현 스님과의 일문일답 내용도 함께 음미했었지만, 고백컨대 미진했던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사관의 문제에 대한 소개였다.


사실 지난 6월호의 만현 스님 법 세계의 소개와 함께 얹어봤던 나의 질문은 간단치 않은 것이라고 본다.

1천만 넘는 불자 수를 자랑하는 한국불교이지만, 과연 1천 년 전의 중국 조사선에 매달리면서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 '지구촌 종교' 불교의 상황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었던 것이다. 해서 이번 호 지면에서는 생사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만현 스님 법 세계에서 커다란 특징을 이루는 핵심이 생사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만현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가 '견성=성불'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대신 견성이란 공부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철저한 지계(持戒)를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조계종과는 수행론에서부터 180도 다르다. 하지만 이런 차이란 결국에는 불교 생사관을 둘러싼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이지만 현재의 한국불교처럼 "지옥과 극락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놓고 나머지 복잡한 문제를 나 몰라라 하며 치지도외할 경우 매우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의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선 지난 호의 지적처럼 본디의 '장대한 종교'인 불교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겨우 마음의 종교(心敎)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 경우 『법화경』 『아함경』 등의 핵심 가르침과 배치된다는 점도 여간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즉 『아함경』 속에 등장하는 지옥을 포함한 장대한 세계가 겨우 대중교화를 위한 편의적인 방편 내지 비유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결과란 정말 자가당착의 경우라서 유감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윤회와 전생의 문제를 포함한 불교 고유의 생사관 문제 역시 미궁의 늪에 빠져버려 거의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역시 대단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서구는 올바른 생사관에 목마르다


현재 한국불교가 봉착한 이런 엄청난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생사관의 정립은 절대로 중요하다. 또 다른 문제는 앞에 언급한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는 불자를 포함한 수많은 이 시대의 대중들이 당면한 지적(知的) 혼란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대중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커다랗고 정확한 그림을 불교가 그려줄 수 없다면, 소망스러운 목표인 '불교=지구촌 종교'는 역부족이다. 앞에 인용한 단행본 『스티프』도 삶과 죽음을 대면하는 서구사회 엘리트들의 진지하면서도, 그러나 실체에서 거리가 없지 않아 꽤나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노력의 한 자락을 보여주지만, 그런 사례는 실은 부지기수이다.


이를테면 지난 해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미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거의 단행본 『빈 서판』(사이언스 북스 펴냄)만 해도 그렇다. 1000쪽 가까운 묵직한 분량의 이 책, 2003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의 최종 후보작이자 2002년 아마존닷컴 에디터가 선정한 최고의 과학저술로 평가받은 이 책은 현 단계 인간의 마음 내지 영혼을 둘러싼 서구 지식사회 지식의 전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 영혼의 실체 규명과 올바른 생사관 정립에 목말라하는 서구 지식사회의 몸부림도 간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혼과 생사관 문제에 관한 한 그토록 오랜, 그리고 넓고 깊은 노하우가 있는 불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을 때, 서구사회는 그들의 지적 전통 안에서나마 나름대로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자기네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맴맴돌이를 하면서도,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를 토대로 해서 자기들 나름의 영혼관, 생사관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면서도,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점이 함께 눈에 뜨인다. 이를테면 저자 스티븐 핑거에 따르면, "인간 영혼, 인간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서구의 지식전통 중에 가장 힘이 센 두 개의 이론이 바로 '빈 서판'이론과, '기계 속의 유령'이란 이론으로 요약된다. 문제는 이것이 생물학을 포함해 과학적 토대가 없는 사이비 과학이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선 빈 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끗이 닦아낸 칠판'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서 나온 말. 즉 인간의 마음이란 본래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깨끗한 백지 상태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따라서 착한 본성이나 악한 마음은 물론 영원한 진리나 신의 관념 따위란 것도 이 깨끗한 마음에 그림을 그려준 교육과 경험이 심어준 '정보들의 더미' 혹은 '환영(幻影)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빈 서판 이론을 들춰보면 서구사회의 어제와 오늘이 한꺼번에 보인다고 나는 본다. 즉 인간은 본래가 백지상태를 가지고 태어나니까 귀족 - 평민 등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구 근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인간 개조'의 헛된 꿈을 가질 수도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열망 혹은 우격다짐식의 사회적 열정으로 곧바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그들이다.


본디 텅 비어있는 인간 마음에 전혀 새롭고도 바람직한 그림을 그려 넣어서(프로그래밍을 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즉 전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자는 맹목적 욕심으로 마구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또 다른 신념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인간의 육체란 마치 시계나 자동차와도 같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 담긴 마음이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기 마련인 별도의 실체라고 굳게 확신을 하는 또 다른 신념이다.

즉 육체가 공간 안에 존재한다면, 마음은 물리적 공간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제3의, 비물질적인, 그리고 불멸의 존재라서 육체 따위와는 분리가 가능한 그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떠신지. 이런 분석에 왠지 비아냥거림 내지 조롱의 분위기가 들어있다는 점이 가늠이 되시는지…. 즉 인간 마음을 보는 이런 두 개의 신념체계는 인지심리학과 언어심리학 분야 서구 최고의 학자인 핑커가 보기에는 가짜 과학에 불과하다. 왜? 그는 인간의 진정한 주인은 유전자, 즉 DNA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핑커가 보기에 이 진정한 주인공인 유전자를 제쳐놓고 인간 본성을 '텅 빈 칠판'이네 뭐네라고 섣부르게 바라보거나, 마음이란 것을 기계에 다름 아닌 육체 안의 어떤 유령 내지 실체 따위로 보는 관념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핑커의 이론이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란 '생물학적 결정론'을 말한다. 즉 인간이란 존재를 유전자의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생각 말이다. 이 경우 적지 않은 당혹스런 결론들을 피할 수 없다. 신적인 높이를 다투는 인간 고유의 위대함이나 성취란 것도 단박에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지옥 - 극락은 '마음의 산물' ?


자, 복잡한 사안을 두고 성급하게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구의 지식사회는 그들 나름의 제한된 틀 속에서나마 인간 생사관을 정립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종교를 가진 사람, 아니 가진 사람들을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과학이 적지 않은 일정한 '세속 종교'의 구실까지해내고 있다는 발견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설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들의 직무유기부터 탓해야 할지 모른다.


그 점에서 만현 스님의 지적대로 현재의 한국불교가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며, "지옥과 극락이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논리는 도무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섣부른 단순논리를 앞세울 경우 불교는 거의 유사 불교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올바른 생사관에 목말라하는 우리 시대의 갈증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혹세무민에 불과한 무당이나 도인들의 검증되지 아니한 신통력에 빠져들어 헛인생을 살 가능성도 농후하다. 확실히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그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계에서 헤매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이 정신 없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세상, 동시에 법이 죽어가는 말법(末法)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 세상이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고 믿는 극도의 허무주의 속에서 그저 부대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수행자들의 경우 무애(無碍)라는 높은 경지를 자신의 것인양 희롱하며, 음계를 지키지 않는 막행막식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만현 스님의 메시지가 전하는 불교의 모습은 심히 장대 장려하다. 엄격한 위계를 가진 장엄한 세계는 거의 전율스럽기 조차하다. 또 깨달음의 단계와 맞춰 수미일관하는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윤회와 전생이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옥이나 하늘과 천상은 빼도 박도 못할 위계질서 속에 층층으로 구분돼 있다. 54개 층의 하늘로 낱낱이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하늘 세계란 모두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 불과하다. 훨씬 아래의 지옥도 존재하며, 제대로 명부에도 들지 못해 중천을 떠도는 무주고혼들의 중음(中陰)의 세계 역시 엄연하다. 반면 부처와 보살 역시 구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실은 적지 않은 불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핵심 대목이기도 한데, 만현 스님에게 부처와 보살들은 그저 추상적인 법신(法身)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존인 보신(報身)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여여하게 존재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는 지금도 인도 영축산의 영산정토에서 법을 설하고 있으며, 보살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화두를 타파한 수행자가 자력의 힘으로, 즉 인간의 능력으로 오를 수 있는 구경각의 단계는 아라한(聖衆) 단계일 뿐이며, 그 이후 부처의 가피라는 타력의 힘으로 비로소 보살 단계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라한이란 나를 죽이는 무아의 공부로 들어가 중생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임이 분명하지만, 아라한의 단계는 결코 골인 지점이 아니다. 그 단계란 아직은 '작은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놓치면 안될 대목은 이런 작은 열반이란 다양한 수행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경계가 온통 뒤집힘으로써 환해져 자성(마음자리)이 드러나는 것은 조계종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으로도 가능하지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밀교 수행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라한 단계 이후의 '큰 열반'의 세계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작은 열반'과 '큰 열반'


아라한이 '작은 열반'에 만족하지 않고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보다 높은 위(位)인 보살 붓다가 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와야 한다. 아라한이 되고 난 뒤 다시 대비심을 발해서 자기의 원력에 따라 이 세상에 몸을 받아온 뒤에 후퇴 없는 수행 정진을 거듭해야 한다. 그 뒤 결정적으로 부처의 위신력이라는 절대적인 가피에 의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다음의 단계가 바로 보살.

  "아라한이라 해도 성중 하늘에 태어났다가 남섬부주(인간세상)에 다시 오면 잘못된 길에 빠져들 경우 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5쪽)는 만현 스님의 지적도 도를 이뤘다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섣부른 법을 설하는 행위에 대한 천둥소리로 들어야 옳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불과를 증한 대성자는 엄청난 빛으로 이뤄진 자신의 불신을 무아 속의 절대계, 즉 상적광토(常寂光土)인 부처의 나라에 비로소 두게 된다.

흥미롭다. 고백하지만 미욱한 나는 평소 의문 하나를 품어왔다. 인간 생사에 관한 의문과 연결된 것인데, 밝히자면 이렇다. 화두를 타파했다는 수행자들의 마음 세계란 어느 정도일까? 확철대오를 했다는 선사들이 도달한 깨침의 수준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또 전등조사들의 깨침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여전히 미욱한 나는 이런 의문 앞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유는 경계에 매달려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기 어렵다는 말 앞에 질려서 그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현 스님의 법문 이후 앞서의 의문들은 조금은 명쾌해졌다. "경계가 뒤집혀 온 세계가 안팎이 훤하여 공이 되는 세계"(『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4쪽)인 견성에도 강약의 단계가 여럿 있다. 크게 깨쳐 오매일여가 되어 꿈에도 법문을 하는 단계에서 더욱 계율을 견지하여 두타행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화두 타파 이후 아라한에 이른 뒤에도 무수한 단계가 더 있으며, 이런 단계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자력 외에 타력의 부처님 가피가 전제가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 경우 불교의 세계란 더 할 나위 없이 장려해지고 지옥과 극락이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는 섣부른 통념에서 벗어날 경우 불교세계란 진정한 위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에 따르면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우리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체(영혼체)세계의 남방 지장궁 방향에 있다는 점, 『지장경』에 등장하는 지옥이란 분명 존재하는 지옥의 일부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중 중지옥의 한 곳의 경우 열 손가락 손톱 밑을 대꼬챙이로 찌르는 그런 지옥도 존재한다. 이곳에서 우리의 가련한 영체는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까무러쳐도 하루에도 만 번이나 죽고 다시 만 번을 되살아나야 하는 지독한 벌을 받게 된다.


앞에서 영체를 말했지만, 자재만현스님에 따르면 영체야말로 진짜 생명체로 파악된다. 매미가 허물을 벗을 때 빠져 나가는 몸이 진짜 매미이듯, 사람이 죽을 때 사대(四大)로 이뤄진 것에 불과한 거짓 몸뚱아리를 떠나는 진짜 생명체가 바로 영체이다. 따라서 이런 파악에서 앞서 언급했던 서구의 심리학자 핑커가 냉소적 시각으로 언급했던 육체 - 마음의 이분법은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다음 자재만현스님의 발언을 귀담아 들어보자. 불교가 훨씬 위대한 종교 세계로 성큼 내 안에 들어온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생에 선근공덕이 있어 온갖 마장을 이겨내고 정진을 멈추지 않아 크게 도를 깨친 이라도 음행을 저지르며, 또는 불보살과 지옥 - 극락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는 망언을 통해 부처님과 법을 왜곡 능멸한다면 무간지옥에 빠져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행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궁극에는 자정기의해서 생사의 해탈을 바라는 위대한 종교입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3쪽)


이밖에 변화술에 능한 천마(天魔)의 속임수로 부처님을 보았다는 등속의 언술에는 상대적으로 초연해질 수도 있다. 확실히 우리 중생들은 과거의 도인들이 보여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채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포함한 신족통, 누진통 등의 신통력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재만현스님은 이런 인간의 앞날을 말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영통은 주로 저급한 영이 인간 몸에 빙의하여 생기는 수준의 신통력이라는 것이 만현 스님의 말이다. 하지만 아라한 성자만 돼도 빙의가 일절 없으며, 영체에서 보름달 같은 백색광이 뿜어져 나와 일체의 귀신이나 외도의 하늘 신들이 혼비백산한다는 메시지는 명쾌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생사관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알만한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와 철학자들의 깨침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도 이 책에는 꽤 등장해서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이를테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그는 '자성은 본 사람'으로 규정된다. 11세기 전설의 성자인 밀라레빠. 그는 정토의 상품상의 보살로 왕생했다. 또 인도의 용수·마명·무착·천친·호법, 중국의 현장 법사·혜원, 우리나라의 원효·의상·서산·함허 스님들의 경우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한 정토 보살들이라고 언급된다.


이런 언급이란 '큰 종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 불교의 세계가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들과 종교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외려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불교 외에도 윤회를 말하는 등 불교에 버금가는 철학을 가진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경우 그 세계의 위대한 성자들도 "중국이나 한국 불교의 대선사라는 분들보다 못할 게 없고"(『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3쪽)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아라한급이나 상품 보살급의 수준"(『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4쪽)이라는 발언은 정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런 발언은 우리 한국불교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 자랑에 정신 팔리지 말라는 것, 그러나 그들은 '작은 열반' 에 이르렀을 뿐 진정 불신(보신과 법신)을 구족한 부처의 존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당당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자이나교·힌두교·유교·유태교·이슬람교 등의 수행법으로도 훌륭하게 삼매에 들 수 있고, 윤회를 벗어난 초인이나 도인이 될 수는 있으나 부처와 부처의 위대한 법에 귀의하지 못한 '외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말합니다. 유교의 거경궁리, 힌두교의 유가 탄트라, 이슬람교의 수피즘의 명상수행, 유태의 카발리즘 수행으로도 우주의 궁극이나 존재의 근원까지를 깨칠 수 있습니다. 힌두의 요기인 부레 바바, 조선의 유가도인인 정북창 같은 도인도 이 세상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붓다는 아닙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5쪽)

결론 - '백안시'를 넘어서 '논쟁'을


나는 조금은 가늠하고 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는 법문집과 함께 돌연 나타난 자재만현스님에 대한 세상의 두 가지 시선을…. '두 가지'란 만현스님의 법문이 외도나 사이비에 다름아닌,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 세계라는 시선이 우선이다. 지금 조계종의 왜소한 철학과 열악한 자기방어의 논리를 감안한다면 응당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는 또 다른 '찬탄의 시선'과 박수 역시 은근히 자리잡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이렇다할 불교서적이 없는 상황에서 만현스님의 법문집은 출간 5개월여 만에 이미 5판을 찍었다. 불교서적 부문 1위 자리 고수는 그 때문이다. 그런 여세로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불교TV 법문도 적지 않은 대중적 반향을 보이고 있다. 법문에는 부산 대구 제주 등지에서 올라온 불자들로 만원을 이루는 현상도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대중들은 새로운 목소리에 목말랐다는 증거다. 당연히 만현스님 법문이 경전의 뒷받침과 독자적인 수행 속에 나온 사자후임을 조금은 가늠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선불교의 표어에 반해 만현스님은 마음을 철견하는 것은 물론 이후 무량겁을 보현의 광대행원을 실천해 보살도를 완성할 것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 때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자기의 불신을, 즉 빛의 존재를 얻어야 비로소 부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공을 지나) 적멸의 저 편에 보살이 가는 서방 극락정토가 있다고 언명한다. 육도(六道)생사를 말하지 않는 어떤 교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요, 외도라는 결론 앞에 우리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더할 수 없이 신선하기도 하다.


본디 1970년대까지 법성 스님이라는 법명을 썼던 그는 오랜 수행과정과 함께 법명까지 바꾸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의 법 세계는 기존의 협소한 불교 세계에 신선한 자극이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시 못할 태풍임이 분명하다. 한국불교가 해야 할 의무란 이런 법 세계에 대해 가슴을 연 대화와 함께 이해의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옳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