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견성, 깨달음의 세계

불제자 2009. 11. 21. 21:46

 

 

 

 

 

견성, 깨달음의 세계

 

 

 

여기서부터는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

고자 한다.  견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은 바로 중

생에 대한 정견을 얻는 것이다.

 

중생이란 선악이라는 관념들이 무분별하게 취산되는 형태를 따

르기 때문에 '무리 중'자와 '생명의 생'자를 사용해서 무리 속에서 살아

가는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리 속의 생명 존재'는 윤회의 바퀴

에 의해 변화하는 관념적 정신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희로애락의 사

슬 구조에 얽매여 마음을 한 시간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요동치면서

살아간다.

 

 <<능엄경>>에는 나그네 살림을 중생이라고 하였다.  견성을 하게 되

면항상 주인공으로 살지만 그렇지 못한 중생은 나그네 살림을 하게

된다.  잠시 부연 설명하면 삿된 기운이란 것이 바로 중생들의 마음인

중생심이다.  수행자들로서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서 한 껍질 한 껍

질 차근차근 우리의 중생심을 벗겨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중생심이 탈각되어 사라질 때 우리의 본 성품이 밝게 드러

난다고 할 수 있다.  한 껍질 벗겨나갈 때 우리는 아품을 느끼고 괴로

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한 고뇌와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인내의 힘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 요

구된다.

 

수행자들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잉태된 진공묘유

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다.  공한데 묘함이 있다는 뜻이다.  정통

도가에서는 현묘지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검고 묘한 도라

는 뜻이다.  햇빛이 없을 때 우주 공간은 검은 색이다.  그리고 단순한

빈 허공이 아니라 프라나, 오르곤, 기라고 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

다.  그래서 묘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묘함을 일으키는 기는

만유에 상호 침투되어 있어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다.

 

물론 이 기 중에서 후천기가 아닌 선천기로서 묘광

으로 빛이 난다.  전우주가 이 묘광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고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일반 중생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

들의 내면의 눈은 오탁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으로 (命濁, 衆生濁, 煩惱濁

見濁, 劫濁을 으른다)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을 깨끗이 정화하지 않는이상 이 '우주 만유' 삼라만상에

가득찬 묘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억종 찬란한 광명

으로 절대 법계에 빛을 방사하고 계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

처럼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해지지 않는 이상 빛을 볼 수 없는 것이

다 이와 같이 도가에서 신묘한 광명으로서 묘광을 거론하는

데 어찌 선불교는 한낮 견성 수준만을 옹호하고 이야기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견성은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까?  명상 수련을 하면

서 얻은 최종 결론은 견성은 내성(견디는 마음의 성질)을 키우는 것이

라 본다.  내면의 힘이 모진 비바람과 고통을 이겨낼 때 불종자라고 하

는 불성의 씨앗은 싹을 틔우는 법이다.

 

그래서 그러한 내성을 키우게 해주고 불성을 꽃피우도록 어떤

면에서 안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수행자에게는 수

행의 은인이자 어떤 면에서 또 한 분의 스승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다.  수행자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안 좋게 반연(작용)하도록 만든 사람이 수행자 자신의 스

승이라니 말이다!  이는 수행자가 억겁 동안 쌓아온 업 속에 존재하는

중생심(대표적으로 사람, 사물 등등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습, 기, 착, 삼독심, 빚, 죄, 악업, 감각애(맛있는 것, 향기 좋은 것, 좋

은 소리 등등의 감각을 추구하는 것)는 큰스님처럼 불과를 증위하지 않는 이

상 그리고 사바세계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는 누구를 만나던

수행의 경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 현현하게 되어 있

다는 사실을 우리 구도자는 명각해야 한다.

 

수행이 무르익으면 업이 플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업이

플릴 때 고통이 수반된다.  이러한 고통을 잘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실타래가 모두 풀려서

자신의 체성이 허공처럼 드러날 때 그때 수행자는 견성이자

현성을 증험하게 된다.  참다운 성품을 증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수행자의 내면에서 분노나 슬픔, 원망 등등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수

행자는 지혜의 눈으로 잘 관찰해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순수할수록

조그마한 번뇌, 분노, 원망조차도 유리알처럼 잘 드러난다.  또한 순수

한 마음의 구도자일수록 타인과 자신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

는 애증은 보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도자는 이러한 애증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전도된 중생심에 의

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착함도 잊고 악함도 잊으라는 고

승의 가르침은 타당한 이야기이다.  즉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

도 생각하지 말라고 혜능 조사는 이야기했는데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요한 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두선이나 염불선도 결국은 집중하여 이러한 선심과 악심을

여의고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견성

적 측면에서 몇몇 선사들의 가르침들 중에는 괜찮은 참된 가르침이 있

다.  만현 큰스님께서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신다.  즉, 화두 일념

을 위해서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취

지로 이들을 부인하는 것을 뭐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견성과 깨달

음 그리고 대오철저가 된 후에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 붓다가 되었

다고 선언하는 것은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