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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만현스님의법세계/조우석(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불제자 2009. 8. 7. 10:26

 

 

 

 

 

한국 불교 올바른 생사관부터 정립을

-자재만현스님의 법세계를 다시 본다.-

 

 

조우석(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본지 6월호에 만현스님의 인터뷰가 나간 뒤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현스님의 법세계를 살펴보는 글이다.


"사체(死體) 부패의 첫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 분해, 즉 자기 소화이다. 인간 세포는 효소를 이용해 활용이 가능한 분자 단위로 쪼개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포의 통제를 받던 효소들은 이제 아무런 제한없이 세포를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 사체 안에 있는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일부 박테리아들은 그 액체를 타고 둥둥 떠다니며 사체의 머나먼 변방으로까지 이주한다. 어디를 가도 박테리아가 가득하다. 이제 무대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바로 팽창 단계다. 박테리아가 우리를 먹는 과정에서 가스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기는 과정이다.

이른바 정상적인 소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장 가스(방귀)와의 차이점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그 가스를 밖으로 내보내지만, 죽은 뒤에는 위 근육이나 괄약근이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배가 팽창하는데, 박테리아가 그중 많은 복부가 가장 두드러지게 부풀어 오른다. 다른 부분에서도 팽창은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은 입과 성기. 남자일 경우 음경과 고환이 대단히 커진다. 그렇다. 멜론 정도의 크기일까? 사체 부패 2주 정도가 지나면 유충들의 크기가 예전의 쌀알 크기에서 밥알만하게 커진다.

유충들이 우글거리는 소리가 사체에 한두 뼘 이내로 머리를 바짝 들이밀면, 뭔가 소리가 들린다. 유충들의 사체를 갉아먹는 소리. 내 곁을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주던 연구원이 알려준다. '꼭 뻥튀기를 갉아 먹는 소리죠' 간혹 몸통 자체가 터지는 때도 있다고 한다. 다시 연구원이 설명해준다. '그 때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게 해서 3주 정도가 되기까지는 장기의 잔해를 분간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수프처럼 된다. 영락없이 노란색의 닭고기 수프다."


어느 서구 지식인의 구상관(九想觀) 하나


마음공부를 위한 불교의 관법(觀法)에는 자비관도 있고, 수식관도 있다지만, 앞에 인용한 글도 훌륭한 관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구상관(九想觀) 혹은 백골관(白骨觀)…. 읽기 거북스럽다는 첫 느낌 따위는 중요한 것이 결코 못된다. 이 글은 서양의 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미국 테네시대학의 메디컬센터 안에 있는 인체 부패를 연구하는 시설을 꼼꼼히 둘러본 뒤 쓴 냉철한 보고서의 일부다. 지난 해 나온 책 『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치 지음, 파라북스 펴냄)의 한 대목인데, 저자 특유의 쿨한 유머 감각이 놀랍고 리얼한 묘사 때문에 그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저자는 때로는 불교 경전 『염처경』을 들먹인다. 그것이야말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인간의 신체라는 것, 그리고 오온(五蘊)의 변화에 다름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실한 관심이리라. 서구사회의 지성들은 이제 동서양의 핵심 고전들에 아무런 편견 없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사관을 정립하고 있는 중이라는 좋은 증거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다. 생사관,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선문화』 6월 호에 나는 자재만현 스님(춘천 현지사)의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소개할 기회가 한 차례 있었고, 현재의 조계종단에는 파천황(破天荒)의 문제제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그 스님 특유의 법 세계를 의미있게 일별해본 일이 있다.

당시 현재의 한국불교의 상황과 인식의 측면에서 그토록 생각과 법 세계가 다르다면 "창종(創宗)을 못할 것도 없다"는 만현 스님과의 일문일답 내용도 함께 음미했었지만, 고백컨대 미진했던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사관의 문제에 대한 소개였다.


사실 지난 6월호의 만현 스님 법 세계의 소개와 함께 얹어봤던 나의 질문은 간단치 않은 것이라고 본다.

1천만 넘는 불자 수를 자랑하는 한국불교이지만, 과연 1천 년 전의 중국 조사선에 매달리면서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 '지구촌 종교' 불교의 상황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었던 것이다. 해서 이번 호 지면에서는 생사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만현 스님 법 세계에서 커다란 특징을 이루는 핵심이 생사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만현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가 '견성=성불'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대신 견성이란 공부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철저한 지계(持戒)를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조계종과는 수행론에서부터 180도 다르다. 하지만 이런 차이란 결국에는 불교 생사관을 둘러싼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이지만 현재의 한국불교처럼 "지옥과 극락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놓고 나머지 복잡한 문제를 나 몰라라 하며 치지도외할 경우 매우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의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선 지난 호의 지적처럼 본디의 '장대한 종교'인 불교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겨우 마음의 종교(心敎)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 경우 『법화경』 『아함경』 등의 핵심 가르침과 배치된다는 점도 여간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즉 『아함경』 속에 등장하는 지옥을 포함한 장대한 세계가 겨우 대중교화를 위한 편의적인 방편 내지 비유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결과란 정말 자가당착의 경우라서 유감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윤회와 전생의 문제를 포함한 불교 고유의 생사관 문제 역시 미궁의 늪에 빠져버려 거의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역시 대단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서구는 올바른 생사관에 목마르다


현재 한국불교가 봉착한 이런 엄청난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생사관의 정립은 절대로 중요하다. 또 다른 문제는 앞에 언급한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는 불자를 포함한 수많은 이 시대의 대중들이 당면한 지적(知的) 혼란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대중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커다랗고 정확한 그림을 불교가 그려줄 수 없다면, 소망스러운 목표인 '불교=지구촌 종교'는 역부족이다. 앞에 인용한 단행본 『스티프』도 삶과 죽음을 대면하는 서구사회 엘리트들의 진지하면서도, 그러나 실체에서 거리가 없지 않아 꽤나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노력의 한 자락을 보여주지만, 그런 사례는 실은 부지기수이다.


이를테면 지난 해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미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거의 단행본 『빈 서판』(사이언스 북스 펴냄)만 해도 그렇다. 1000쪽 가까운 묵직한 분량의 이 책, 2003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의 최종 후보작이자 2002년 아마존닷컴 에디터가 선정한 최고의 과학저술로 평가받은 이 책은 현 단계 인간의 마음 내지 영혼을 둘러싼 서구 지식사회 지식의 전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 영혼의 실체 규명과 올바른 생사관 정립에 목말라하는 서구 지식사회의 몸부림도 간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혼과 생사관 문제에 관한 한 그토록 오랜, 그리고 넓고 깊은 노하우가 있는 불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을 때, 서구사회는 그들의 지적 전통 안에서나마 나름대로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자기네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맴맴돌이를 하면서도,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를 토대로 해서 자기들 나름의 영혼관, 생사관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면서도,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점이 함께 눈에 뜨인다. 이를테면 저자 스티븐 핑거에 따르면, "인간 영혼, 인간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서구의 지식전통 중에 가장 힘이 센 두 개의 이론이 바로 '빈 서판'이론과, '기계 속의 유령'이란 이론으로 요약된다. 문제는 이것이 생물학을 포함해 과학적 토대가 없는 사이비 과학이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선 빈 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끗이 닦아낸 칠판'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서 나온 말. 즉 인간의 마음이란 본래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깨끗한 백지 상태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따라서 착한 본성이나 악한 마음은 물론 영원한 진리나 신의 관념 따위란 것도 이 깨끗한 마음에 그림을 그려준 교육과 경험이 심어준 '정보들의 더미' 혹은 '환영(幻影)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빈 서판 이론을 들춰보면 서구사회의 어제와 오늘이 한꺼번에 보인다고 나는 본다. 즉 인간은 본래가 백지상태를 가지고 태어나니까 귀족 - 평민 등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구 근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인간 개조'의 헛된 꿈을 가질 수도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열망 혹은 우격다짐식의 사회적 열정으로 곧바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그들이다.


본디 텅 비어있는 인간 마음에 전혀 새롭고도 바람직한 그림을 그려 넣어서(프로그래밍을 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즉 전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자는 맹목적 욕심으로 마구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또 다른 신념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인간의 육체란 마치 시계나 자동차와도 같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 담긴 마음이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기 마련인 별도의 실체라고 굳게 확신을 하는 또 다른 신념이다.

즉 육체가 공간 안에 존재한다면, 마음은 물리적 공간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제3의, 비물질적인, 그리고 불멸의 존재라서 육체 따위와는 분리가 가능한 그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떠신지. 이런 분석에 왠지 비아냥거림 내지 조롱의 분위기가 들어있다는 점이 가늠이 되시는지…. 즉 인간 마음을 보는 이런 두 개의 신념체계는 인지심리학과 언어심리학 분야 서구 최고의 학자인 핑커가 보기에는 가짜 과학에 불과하다. 왜? 그는 인간의 진정한 주인은 유전자, 즉 DNA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핑커가 보기에 이 진정한 주인공인 유전자를 제쳐놓고 인간 본성을 '텅 빈 칠판'이네 뭐네라고 섣부르게 바라보거나, 마음이란 것을 기계에 다름 아닌 육체 안의 어떤 유령 내지 실체 따위로 보는 관념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핑커의 이론이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란 '생물학적 결정론'을 말한다. 즉 인간이란 존재를 유전자의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생각 말이다. 이 경우 적지 않은 당혹스런 결론들을 피할 수 없다. 신적인 높이를 다투는 인간 고유의 위대함이나 성취란 것도 단박에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지옥 - 극락은 '마음의 산물' ?


자, 복잡한 사안을 두고 성급하게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구의 지식사회는 그들 나름의 제한된 틀 속에서나마 인간 생사관을 정립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종교를 가진 사람, 아니 가진 사람들을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과학이 적지 않은 일정한 '세속 종교'의 구실까지해내고 있다는 발견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설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들의 직무유기부터 탓해야 할지 모른다.


그 점에서 만현 스님의 지적대로 현재의 한국불교가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며, "지옥과 극락이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논리는 도무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섣부른 단순논리를 앞세울 경우 불교는 거의 유사 불교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올바른 생사관에 목말라하는 우리 시대의 갈증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혹세무민에 불과한 무당이나 도인들의 검증되지 아니한 신통력에 빠져들어 헛인생을 살 가능성도 농후하다. 확실히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그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계에서 헤매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이 정신 없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세상, 동시에 법이 죽어가는 말법(末法)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 세상이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고 믿는 극도의 허무주의 속에서 그저 부대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수행자들의 경우 무애(無碍)라는 높은 경지를 자신의 것인양 희롱하며, 음계를 지키지 않는 막행막식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만현 스님의 메시지가 전하는 불교의 모습은 심히 장대 장려하다. 엄격한 위계를 가진 장엄한 세계는 거의 전율스럽기 조차하다. 또 깨달음의 단계와 맞춰 수미일관하는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윤회와 전생이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옥이나 하늘과 천상은 빼도 박도 못할 위계질서 속에 층층으로 구분돼 있다. 54개 층의 하늘로 낱낱이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하늘 세계란 모두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 불과하다. 훨씬 아래의 지옥도 존재하며, 제대로 명부에도 들지 못해 중천을 떠도는 무주고혼들의 중음(中陰)의 세계 역시 엄연하다. 반면 부처와 보살 역시 구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실은 적지 않은 불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핵심 대목이기도 한데, 만현 스님에게 부처와 보살들은 그저 추상적인 법신(法身)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존인 보신(報身)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여여하게 존재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는 지금도 인도 영축산의 영산정토에서 법을 설하고 있으며, 보살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화두를 타파한 수행자가 자력의 힘으로, 즉 인간의 능력으로 오를 수 있는 구경각의 단계는 아라한(聖衆) 단계일 뿐이며, 그 이후 부처의 가피라는 타력의 힘으로 비로소 보살 단계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라한이란 나를 죽이는 무아의 공부로 들어가 중생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임이 분명하지만, 아라한의 단계는 결코 골인 지점이 아니다. 그 단계란 아직은 '작은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놓치면 안될 대목은 이런 작은 열반이란 다양한 수행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경계가 온통 뒤집힘으로써 환해져 자성(마음자리)이 드러나는 것은 조계종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으로도 가능하지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밀교 수행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라한 단계 이후의 '큰 열반'의 세계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작은 열반'과 '큰 열반'


아라한이 '작은 열반'에 만족하지 않고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보다 높은 위(位)인 보살 붓다가 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와야 한다. 아라한이 되고 난 뒤 다시 대비심을 발해서 자기의 원력에 따라 이 세상에 몸을 받아온 뒤에 후퇴 없는 수행 정진을 거듭해야 한다. 그 뒤 결정적으로 부처의 위신력이라는 절대적인 가피에 의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다음의 단계가 바로 보살.

  "아라한이라 해도 성중 하늘에 태어났다가 남섬부주(인간세상)에 다시 오면 잘못된 길에 빠져들 경우 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5쪽)는 만현 스님의 지적도 도를 이뤘다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섣부른 법을 설하는 행위에 대한 천둥소리로 들어야 옳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불과를 증한 대성자는 엄청난 빛으로 이뤄진 자신의 불신을 무아 속의 절대계, 즉 상적광토(常寂光土)인 부처의 나라에 비로소 두게 된다.

흥미롭다. 고백하지만 미욱한 나는 평소 의문 하나를 품어왔다. 인간 생사에 관한 의문과 연결된 것인데, 밝히자면 이렇다. 화두를 타파했다는 수행자들의 마음 세계란 어느 정도일까? 확철대오를 했다는 선사들이 도달한 깨침의 수준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또 전등조사들의 깨침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여전히 미욱한 나는 이런 의문 앞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유는 경계에 매달려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기 어렵다는 말 앞에 질려서 그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현 스님의 법문 이후 앞서의 의문들은 조금은 명쾌해졌다. "경계가 뒤집혀 온 세계가 안팎이 훤하여 공이 되는 세계"(『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4쪽)인 견성에도 강약의 단계가 여럿 있다. 크게 깨쳐 오매일여가 되어 꿈에도 법문을 하는 단계에서 더욱 계율을 견지하여 두타행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화두 타파 이후 아라한에 이른 뒤에도 무수한 단계가 더 있으며, 이런 단계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자력 외에 타력의 부처님 가피가 전제가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 경우 불교의 세계란 더 할 나위 없이 장려해지고 지옥과 극락이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는 섣부른 통념에서 벗어날 경우 불교세계란 진정한 위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에 따르면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우리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체(영혼체)세계의 남방 지장궁 방향에 있다는 점, 『지장경』에 등장하는 지옥이란 분명 존재하는 지옥의 일부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중 중지옥의 한 곳의 경우 열 손가락 손톱 밑을 대꼬챙이로 찌르는 그런 지옥도 존재한다. 이곳에서 우리의 가련한 영체는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까무러쳐도 하루에도 만 번이나 죽고 다시 만 번을 되살아나야 하는 지독한 벌을 받게 된다.


앞에서 영체를 말했지만, 자재만현스님에 따르면 영체야말로 진짜 생명체로 파악된다. 매미가 허물을 벗을 때 빠져 나가는 몸이 진짜 매미이듯, 사람이 죽을 때 사대(四大)로 이뤄진 것에 불과한 거짓 몸뚱아리를 떠나는 진짜 생명체가 바로 영체이다. 따라서 이런 파악에서 앞서 언급했던 서구의 심리학자 핑커가 냉소적 시각으로 언급했던 육체 - 마음의 이분법은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다음 자재만현스님의 발언을 귀담아 들어보자. 불교가 훨씬 위대한 종교 세계로 성큼 내 안에 들어온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생에 선근공덕이 있어 온갖 마장을 이겨내고 정진을 멈추지 않아 크게 도를 깨친 이라도 음행을 저지르며, 또는 불보살과 지옥 - 극락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는 망언을 통해 부처님과 법을 왜곡 능멸한다면 무간지옥에 빠져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행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궁극에는 자정기의해서 생사의 해탈을 바라는 위대한 종교입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3쪽)


이밖에 변화술에 능한 천마(天魔)의 속임수로 부처님을 보았다는 등속의 언술에는 상대적으로 초연해질 수도 있다. 확실히 우리 중생들은 과거의 도인들이 보여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채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포함한 신족통, 누진통 등의 신통력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재만현스님은 이런 인간의 앞날을 말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영통은 주로 저급한 영이 인간 몸에 빙의하여 생기는 수준의 신통력이라는 것이 만현 스님의 말이다. 하지만 아라한 성자만 돼도 빙의가 일절 없으며, 영체에서 보름달 같은 백색광이 뿜어져 나와 일체의 귀신이나 외도의 하늘 신들이 혼비백산한다는 메시지는 명쾌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생사관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알만한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와 철학자들의 깨침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도 이 책에는 꽤 등장해서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이를테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그는 '자성은 본 사람'으로 규정된다. 11세기 전설의 성자인 밀라레빠. 그는 정토의 상품상의 보살로 왕생했다. 또 인도의 용수·마명·무착·천친·호법, 중국의 현장 법사·혜원, 우리나라의 원효·의상·서산·함허 스님들의 경우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한 정토 보살들이라고 언급된다.


이런 언급이란 '큰 종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 불교의 세계가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들과 종교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외려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불교 외에도 윤회를 말하는 등 불교에 버금가는 철학을 가진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경우 그 세계의 위대한 성자들도 "중국이나 한국 불교의 대선사라는 분들보다 못할 게 없고"(『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3쪽)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아라한급이나 상품 보살급의 수준"(『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4쪽)이라는 발언은 정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런 발언은 우리 한국불교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 자랑에 정신 팔리지 말라는 것, 그러나 그들은 '작은 열반' 에 이르렀을 뿐 진정 불신(보신과 법신)을 구족한 부처의 존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당당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자이나교·힌두교·유교·유태교·이슬람교 등의 수행법으로도 훌륭하게 삼매에 들 수 있고, 윤회를 벗어난 초인이나 도인이 될 수는 있으나 부처와 부처의 위대한 법에 귀의하지 못한 '외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말합니다. 유교의 거경궁리, 힌두교의 유가 탄트라, 이슬람교의 수피즘의 명상수행, 유태의 카발리즘 수행으로도 우주의 궁극이나 존재의 근원까지를 깨칠 수 있습니다. 힌두의 요기인 부레 바바, 조선의 유가도인인 정북창 같은 도인도 이 세상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붓다는 아닙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5쪽)

결론 - '백안시'를 넘어서 '논쟁'을


나는 조금은 가늠하고 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는 법문집과 함께 돌연 나타난 자재만현스님에 대한 세상의 두 가지 시선을…. '두 가지'란 만현스님의 법문이 외도나 사이비에 다름아닌,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 세계라는 시선이 우선이다. 지금 조계종의 왜소한 철학과 열악한 자기방어의 논리를 감안한다면 응당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는 또 다른 '찬탄의 시선'과 박수 역시 은근히 자리잡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이렇다할 불교서적이 없는 상황에서 만현스님의 법문집은 출간 5개월여 만에 이미 5판을 찍었다. 불교서적 부문 1위 자리 고수는 그 때문이다. 그런 여세로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불교TV 법문도 적지 않은 대중적 반향을 보이고 있다. 법문에는 부산 대구 제주 등지에서 올라온 불자들로 만원을 이루는 현상도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대중들은 새로운 목소리에 목말랐다는 증거다. 당연히 만현스님 법문이 경전의 뒷받침과 독자적인 수행 속에 나온 사자후임을 조금은 가늠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선불교의 표어에 반해 만현스님은 마음을 철견하는 것은 물론 이후 무량겁을 보현의 광대행원을 실천해 보살도를 완성할 것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 때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자기의 불신을, 즉 빛의 존재를 얻어야 비로소 부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공을 지나) 적멸의 저 편에 보살이 가는 서방 극락정토가 있다고 언명한다. 육도(六道)생사를 말하지 않는 어떤 교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요, 외도라는 결론 앞에 우리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더할 수 없이 신선하기도 하다.


본디 1970년대까지 법성 스님이라는 법명을 썼던 그는 오랜 수행과정과 함께 법명까지 바꾸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의 법 세계는 기존의 협소한 불교 세계에 신선한 자극이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시 못할 태풍임이 분명하다. 한국불교가 해야 할 의무란 이런 법 세계에 대해 가슴을 연 대화와 함께 이해의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옳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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