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에서 삼매까지/.....불교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불제자 2011. 5. 12. 17:30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읿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체를 영체라고도 부릅니다.

중생의 영혼체는 다층구조이며 4개의 영혼체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라한 도 이상을 이뤄야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삼매에 자재해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3번 영체로 몸을 빠져 나간다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고 하늘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신한다 해도 3번 영체로 빠져 나가는 삼매진정한 삼매가 아님라면

그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2번 영체로 몸을 자유로이 나고 든대도 그것 역시 진정한 삼매가 아닙니다.

1번 영제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극락정토까지 갈 수 있어서 여기부터가 진정한

삼매의 시작입니다.

 

삼매에 들려면 심신이 맑고 청정해야 합니다.  우주가 이 몸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이 경계는 아라한부터

가능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안과 밖이 수정같이 맑아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을 뛰어 넘습니다.  그저 깨끗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상대가 빙의됐는지 여부도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삼메에

들었는지도 압니다.  견성하고 도통했다지만 절반 이상은 빙의된 경우이고,

공부 많이 한 수행자가 명부에 못 들어가 수행자에게 빙의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가 빙의된 데다, 그리고 선서를 많이 보아서 오도송도 나오고, 법거량도

휼륭하게(?) 하기때문에 격외를 노래한다고 해서, 아라한 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아 속 삼매가 진정한 삼매이고, 완벽한 생사해탈, 즉 대열반은 무아 속 삼매에

자재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기의 불신을 얻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불신을 얻는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완전 계합입니다. 업장과 번뇌, 그 습기의

찌꺼기까지 다 녹아야 불신이 생깁니다.  이 일은 부처님 경계이기에 윤회 안

중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 법문이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불신을 두지 못하면, 즉

청정법신과 원만보신을 구족하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는 것만 재삼

말씀해 둡니다.

 

불법, 정법을 만나 삼악도에 안 떨어지는 것만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가능하면 여기에서도 큰스님을 만나 수행해서 윤회를 벗어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중의 반열에 들면 영원히 인간세계에 안 나오려면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고 더구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듣고서도 우리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라한 성과를 이루면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타행만은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선근공덕의 보따리가 문제입니다.

그 보따리가 커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아라한 되고, 보살 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근보따리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