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에서 삼매까지/현지궁 현지사

21세기 붓다의 메시지_종교상의 혁명적 발견

불제자 2010. 7. 10. 20:03



 

 

 


21세기 붓다의 메시지_종교상의 혁명적 발견

 

 

 

2005년도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나오자 불자들의 반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우리 현지사에서도 이 책자를 직접 판매하고, OO불교서점에서도 시판하였던 바 시판한 달부터 불교서점 판매집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로 6개월간 계속 이어져갔습니다.


 

불교TV에서는 1년간 릴레이 설법을 요청해왔고 이를 수락하여 TV 법문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불교TV 무상사에서 법문을 하는 날에는 전국 불자들이 상경하여 초만원을 이루었고, 시청률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고 TV측은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6개월을 법문하는 중에 예측했던 대로 OO종단 측의 훼방 압력이 인터넷을 비롯해서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단 서적이라는 것입니다. 서점에도 금서이니 판매하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결국 종단과 간화선 행자들의 거대한 압력에 불교TV 측은 굴복하고 나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도중에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화두공안를 들지 않으면 외도로 매도하는, 그런 배타성이 강한 종단인 것입니다. 그들의 눈엔 염불, 계율은 이단이요 외도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인류 역사 이래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더한 종교상의 혁명적 발견을 세상에 발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개론서이며, 지금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Ⅱ≫에서는 좀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부디 정독하셔서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귀의해주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井底之蛙

 

 

붓다의 경지에 오른 분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우뚝 선 것과 같습니다. 산 정상에 오른 이는 그 밑 중턱과 아래 모두를 보고 압니다. 그러나 산 중턱까지만 오른 이들은 그 위쪽과 산정山頂을 모릅니다. 상품보살도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는 깊은 적멸의 부처님들의 빛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외도의 신들이, 설사 하늘 신 가운데 왕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수장首長들이라 해도 부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영성에 관한 책들 중에 히말라야 깊은 산에서 몇 백 년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 붓다부처님를 만나 뵙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절대계에 계시는 부처님은 원만보신 노사나불이십니다. 그 분은 항상 108쪽 빨강 가사에 황금색 장삼, 말끔히 머리 깎으시고 8고리 석장을 드십니다.

부처님의 변화신경험세계에 나투시는 몸 역시 그러하십니다. 삼계의 왕이시기에 항상 위엄을 갖추십니다. 화신불 역시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자에 나오는 붓다는 천마의 변화신일 뿐인 것입니다. 나의 이 말씀은 진실임을 강조합니다. 천마의 변화신을 붓다인 줄 알고 거룩하신 우리 부처님을 낮추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 중생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십니다.

 

1975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대회에서 힌두교의 성인이 기조 연설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A라는 개구리는 어떤 우물 속에서 태어나 쭉 거기서만 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바다에서만 살던 B라는 다른 개구리가 육지에 기어 올라왔다가 그 우물에 빠졌습니다.

A: 너는 어디에서 왔니?

B: 바다에서.

A: 바다는 얼마나 크냐? 이 우물과 같으냐?

B: 바다를 이런 좁은 우물과 비교한단 말이냐?

A: 이 우물보다 더 큰 세상은 있을 수 없다. 이 거짓말쟁이야. 어서 썩 나가지 못해!“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의 우물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우물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종교인은 무종교인대로 그러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자신의 우물에 빠져있으며, 선불교는 선불교대로 자신만의 우물에 빠져있습니다. 과학은 과학대로 그러합니다.


 

몇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평을 합니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기둥 같다 합니다. 코를 만져본 이는 밧줄 같다 하고, 귀를 만져본 사람은 큰 부채 혹은 키곡식 따위를 까부르는 도구 같다 하고, 배를 만진 이는 벽과 같다고 우깁니다. 부분만을 접촉하고,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인데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들 역시 다른 종교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분만을 알고 자기들이 제일이요, 남의 종교는 모두 이단이요 사탄이라 합니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우물 안 개구리를 찾은 동해거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자신을 찾은 동해바다의 거북을 만나 말합니다. “나의 우물 안 생활은 너무도 즐겁다네. 나는 우물 난간에 폴짝거리며 노닐다가 피곤하면 깨진 우물 벽에 들어가 쉬고, 물속에서는 겨드랑이께로 헤엄치다 피곤하면 턱을 물 위에 내놓고 쉰다네. 우물을 독차지한 즐거움이란 더할 나위 없는 것. 자네도 이리 와서 한 번 둘러보게나.”


 

그 권유에 따라 동해의 거북이가 우물 속으로 왼쪽 발을 내려놓았지만, 채 내려오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버렸다. 발을 빼낸 거북이는 미안해하며 바다에 대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바다는 천 리로도 그 넓이를 재지 못하고, 천 길로도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네. 9년 동안 홍수가 쏟아졌지만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7년 동안의 가뭄에도 물이 줄어들지 않았지. 시간이 흘러도 그만, 물이 들어오고 나가도 그만이라. 이것이 바다의 큰 즐거움이라네.”

이 말을 듣고 우물 안 개구리는 깜짝 놀라 얼이 빠져버렸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