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사의 불서/.....법문집 1권

2006년 10월 24일 자재만현큰스님 현지사 춘천 정기법회

불제자 2010. 6. 29. 21:41

 

 

 

 

 

2006년 10월 24일 자재만현큰스님 현지사 춘천 정기법회 

 

 

 

두 달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착하고 훌륭하신 우리 단월님들 그 동안 뵙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두 달 동안 공부도 많이 했고, 여러분들이 와서 보시다시피 불사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 보람된 시간을 가졌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 나이로 보더라도 통절하게 참회를 해야 하고, 과거∙과거생에 내가 지은 지중한 업에 대해서 통절하게 참회를 해야 되고, 그리고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귀명 할 것을 날마다 소원(발원) 해야 되고, 그리고 지킬 수 있는데 까지 계율을 지켜야 되고, 그리고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 되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 그 조상님은 여러분들의 과거생에 부모요, 자식이요, 남편입니다. 그래서 그 조상님들이 보니까 거의 모두 대부분이 악도로 가 있습니다. 지옥, 아귀, 축생으로. 지옥, 아귀, 축생도 들어가지 못하고 명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현지사에서는 ‘부모님들께 여러분들이 효를 다 하십니오.’ 간절히 권하는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할 일입니다. 자손된 도리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죠.

축생, 지옥의 고통이 인간세상 어떠한 형벌보다도 더 참을 수 없습니다. 혹 바꾸어서 ‘여러분이 명부에 못 들어갔다. 짐승 몸을 받았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신 이후로 정말 큰스님이 이 세상에 출세했다면,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왜곡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더더구나 한국은 천 년 동안 선불교가 군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불교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대단히 독선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대학교수한테도, 불교 교수한테 물어봐도 오리무중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처요, 깨치면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붓다’라고 그래요. 어디가 부처님이 있고, 지옥이 어디 있고, 극락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요. 마음 안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몸 불신관도 삼신설도 마음 안에서 그들은 찾습니다. 이 가르침이 천 년을 내려왔습니다. 내가 분연히 일어나서

 

‘이것은 아니요. 절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무아속 절대계에 계십니다. 모든 불과를 이룬 붓다님들은 무아속 절대계에 계십니다.’

 

무량광이라고 하는 엄청난 빛으로 이루어진 그 불신, 원만보신을 다 지니고 계시더군요. 또 자기의 법신불을 가지고 있고, 언제라도 인간 세상에 와서 교화할 수 있는, 여러 국토를 나가서 중생을 교화하는 화신이 있습니다. 화신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라고 하면 삼신을 갖추어야, 불신을 얻어야, 원만보신을 얻어야 붓다요. 붓다가 계시는 곳이 있고, 그 붓다의 몸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도 없고, 그 붓다는 대적정삼매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대적정삼매의 맛은 여러분이 살면서 느꼈던 일고의 행복, 희열의 백천만배가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희열, 환희, 항상 그것을 보존하고서 항상 그 속에서, 그러니까 미래제가 다 하도록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고, 항상 극락에 극락을 수용하고 계십니다. 붓다님들은요. 무간지옥도 있고 윤회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모르냐구요? 경전에도 씌어져있는데 왜 이것을 사이비라고 하냐구요? 이들禪佛敎은 너무 너무도 사이비요 외도입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정말로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악도로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막아야 됩니다. 떨어지지 않을 수가 있는데, 큰스님들이 없기 때문에 대단히 인생을 멋지게 살아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옳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정법을 포교하고, 불쌍한 이웃을 생각하고,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신도 분들은 <금강경>을 읽고, 비로자나총귀진언을 읽고, 꼭 석가모니불 칭명을 하되 세간적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남편∙자식 등등의 소망,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대단히 용맹스럽게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머리가 돕니다. 그래서 진이 아직 남아 있는 신도분들은 공부를 1시간 정도로 하되, 대신 귀의∙귀명할 것을 하루 세 번씩 간절하게 부처님께 하십시오.

‘거룩하신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 이 목숨 다해서 귀의∙귀명합니다.’

이것을 세 번 봉창하고 번뇌에다 무게를 두세요. 이 발원에다가 무게를 실으시오. 그러나 ‘부처님! 어디 사는 무슨 때 이름은 누구 다음 생에는 정법을 만나고 큰 스님을 만나서 기어이 윤회생사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소서.’ 이런 발원을 강하게 하세요. 그러면서 탐∙진∙치 삼독을 더는 그런 행을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중에서도 대단히 선근이 있고 스님 못지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3~4시간씩 하세요. 훨씬 많이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기 전에 반드시 현지사 천도재를 하세요. 현지사에. 왜 그러냐? 억겁다생으로 내려오면서 그 나쁜 사악한 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빙의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공부를 하면 외도로 빠집니다. 그래서 현지사 천도재를 하도록 권하는 겁니다. 그러면 2부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그리고 감사기도 때 부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여기는요 이 부분은 많은 말을 해야 되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업장을 씻어 주시고, 빙의된 영가를 떼어 줍니다. 이런 후에 공부하라구요. 그래야 공부가 되니까. 그렇지 않고 공부하면 외도로 빠지거나, 잘 못하면 정신질환을 얻어. 그래서 스님이 팀장들한테 나누어 주는 책에 그러한 언급을 했고, 가끔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줄 때 이야기를 하고 또 오늘 강조해 둡니다.

 

공부의 요체는 일심분란, 일념상속에 있습니다. 집지명호에 의해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한 생각이 되어야 된다.’ 그 말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에서 자식 낳고, 남편 시중들고 또 가정주부로서 살다 보니까 번뇌가 많아요. 일념 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스님이 현지사 칭명염불법을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오늘 지금까지 두 달 동안 쉬었기 때문에 종합해서 말씀 드릴거에요. 여러분들한테. 일점을 여러분 눈높이에다 찍고, 석가모니불을 정근할 때 두 눈을 그 하나의 점에다가 완전히 걸어 놓으라구요. 이게 어렵습니다. 눈 깜빡거리지 말고 그 점을 응시하면서 석가모니불을 할 때, 눈에서 코에서 눈물, 콧물이 쏟아집니다. 그래도 눈을 깜빡거리지 말라고요. 여기에 묘미가 있습니다. 이 때 여러분의 지은 업이 정화가 됩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할 때 1분 3분 5분 10분가면 망상 피우는 놈이 있어. 마슬 돌아다니는 놈이 있어. 그 놈으로 하여금 과제를 주어야 됩니다. 석가모니불을 할 때는 ‘금강반야바라밀’을,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동시에 해라. 동시에. 그래서 이제 공부가 잘 되면 그게 일념입니다. 거기가요.

 

그럼 이제 《금강경》을 읽어봐. 아침에 《금강경》을 읽어 보면서 어떻게 하냐? ‘석가모니불’을 해봐. 망상 피우는 놈으로 하여금 《금강경》을 천천히 읽던 빨리 읽던 간에 석가모니불을 해봐. 잘 되거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나’그 말이야. 행ㆍ주ㆍ좌ㆍ와 어ㆍ묵ㆍ동ㆍ정, ‘언제나’ 그 말이야. 친구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항상 속에서 ‘석가모니불’을 해야 돼. 일념입니다. 석가모니불을 하는데 망상이 안 떠올라. 이게 일념입니다. 일념상속, 일심분란이요. 이 경지에 가면 이제 한 점을 향해서 석가모니불상 미간에서 방광하는 것을 관해봐. 석가모니 부처님 상. 여러분한테 나누어 준 성상액자 이 미간에 백호상관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간 방광상이라고 합니다. 그걸 관하면서 빛이 나가는 것을 관해. 그것이 되면서 옅은 삼매로 깊은 삼매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이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경지입니다. 거기가요.

그래서 현지사의 칭명염불 법은 상근기가 하는 지금까지는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만 하든가, ‘관세음보살’만 하든가 그랬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반드시 대승경전을 읽고, 여러분들은 아직 중생이기 때문에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나약해요. 그래서 다라니를 해야 되고, 그래서 칭명해 들어 갈 때 이 생각 요 놈이 문제라구요. 칭명할 때. 요 놈한테 공부를 안 주면 요 놈은 한 없이 돌아다닌다고, 망상 피운다고. 그럼 일념이 안돼. 그런 공부는 효과가 없어. 그래서 요 놈으로 하여금 공부를 하도록 해줘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이요. 큰 불교사에서 처음 선을 뵈는 수행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렇게 하는 분이 있어요. 지금 아마 20명 정도는 일념 가까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 분들은 지금 죽어도 윤회를 벗어납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그렇게 공부를 해 주시기 바라고.

 

내가 언젠가 TV 법문 할 때 젊은이들 회임 가능기에 있는 젊은 우리 주부들, 애를 가졌을 때 ‘관세음보살’ 많이 하세요. 그런 설명하면서 늘 부탁했는데 그렇게 하시도록 하세요. 여러분들 자부들한테요. 영특하고 불교에 인연 있고 효하고 전생에 선근이 있는 자식을 볼 것입니다. 이 사실은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법화경》에.

 

그 다음에 여러분이 평소에 살다보면 화도 나고 어떤 때는 욕심도 솟아 오르고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 하느냐? 염불행자로서 그럴 때는 그 몹쓸 생각이 나는 자리로 생각을 임하세요. 그 자리를, 그 생각이 나오는 자리를 관하면서 ‘석가모니불’ 혹은 ‘관세음보살’을 칭명하세요. 그러면서 부처님 ‘이 욕심 뿌리, 이 화의 뿌리, 진심嗔心의 뿌리를 뽑아 주소서.’ 이렇게 하면서 염불하면 뿌리가 뽑혀 집니다. 이것이 도망가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뽑혀집니다. 이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는 11월 달에는 ‘선문화’ 라고 하는 불교 잡지, 지난 해 6월 11월에 붓다의 메시지를 존평하는 글이 나갔었잖아요? 오는 11월에 글이 하나 나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11월 중에 우리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현지사의 사상을 지식인 학자 석학급들의 존평, 그것을 묶어서 책으로 나갑니다. 7명이 동원됩니다. 대학교수요, 공학박사로 계신 분, 모 인도 철학을 전공해서 한국에서 한 두명 꼽는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인 종교학 박사, 동양철학을 한 박사, 법학 박사, 의학 박사, 재야 학자, 신문사 종교 전문 부장 9명이 이 글을, 이 책을 어마어마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1권으로 500페이지 정도로 해서 나갑니다. 이것을 국립도서관, 도립ㆍ시립 공공 도서관, 전문대학 이상의 대학 도서관에 3권 정도씩 내 책하고 이 존평을 묶은 책자, 내 사상을 객관적으로 검증한 이것은 미증유한, 일찍이 보지 못한, 경전의 반열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성서로서 존평이 나갑니다.

11월에 나갈 어느 재야 학자의 글입니다. 이 사람은 나하고 안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없으니까 읽어 드릴 겁니다.

 

미증유의 성서聖書로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아! 만현 큰스님, 21세기 불교 수행문화의 신지평을 여시다.

-신영호 평술評述-

 

머리글

 

금세기 유례없이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세계열강의 세력 속에서 국운의 성패와 흥망을 놓고 쟁패爭覇를 벌이는 암운暗雲의 그림자 아래 한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긴장하고 방황하고 있다. 아니 세계적으로 불안과 공포가 끊이지 않으며 종교적 갈등의 골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어떠한 해법의 실마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명실상부한 최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에서도 미래에 대한 정확한 방향타를 설정하지 못하는 불제자들이 많이 있다. 불교 수행자들은 바야흐로 더 절실하고 시급히 구원의 손길을 찾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 그 구원의 손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2500년 전 영산당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불세존佛世尊의 가르침을 회고하고 되새겨 봐야한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의 존엄한 말씀과 거룩하신 가르침을 되살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따라서 그 시절 그 장소에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친견해서 들어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불제자들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오늘날 불제자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원시불교를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바로 21세기에 맞는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적 원형原型이요 정수 精髓를 증득하는 것이다. 아! 정령 그 누가 21세기에 맞는 불교의 가르침을 원시불교를 살려서 온고지신하고 일신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하여 자세히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여기에 한 분의 성스러운 큰스님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자재통왕불이신 만현 큰스님이시다. 그 거룩하고 희유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극히 순수한 가르침과 청정한 친설親設을 토대로 만현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하셨다. 이 진경(眞經)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그 누가 이토록 읽는 이로 하여금 시종일관 법열(法悅)속에서 있도록 강렬한 어조와 지고한 경지에서 글을 써내려갈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의 그 위대하신 가르침의 맥을 이어받고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분이 영산당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시다. 영산당시의 아난존자께서 다시와 부처님의 법을 세상에 펴니 그 서막이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인 것이다.

 

불교가 지향해야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으 fdlfjgrp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볼 수 있다. 선불교는 엄연히 한국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n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원시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하였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義)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불교를 원시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나 이집트문명의 타로체계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인 그노시즘Gnosticism:영지주의(靈智主義)의 최종목표와도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소프Ayin Soph: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으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수행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이다. 따라서 전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 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수행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결국 선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나도 음계(婬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기에 큰스님께서 친히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전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신비체험과 증험적 세계

 

이제 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미증유의 보서이며 전대미문의 성서(聖書)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나오는 모든 항목들이 주옥같은 항목들로 선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량광(無量光), 윤회전생(輪廻轉生), 염불선(念佛禪), 무아사상(無我思想), 불가의 삼신설(三身說), 대승비불설(大乘非不說), 아라한-보살-붓다의 위계(位階), 신통(神通)의 부작용, 삼매(三昧), 불보살의 세계 등등 항목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하고 명료하며 또한 불교의 정신세계를 극명하게 대변해주는 항목들을 초출하여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하게 해주는 동시에 맑게 정화해 준다는 점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중심 내용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바로 “남섬부주 선남자 선여인에게 전하노라”라고 하는 부처님의 친설로 책의 서문(序文)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히 두뇌를 전율시키고 온몸을 긴장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부처님의 법설(法說)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눈뜬자, 그리고 전생과 현생에 선근공덕을 지은 선남자 선여인이라면 큰스님의 법문이 가히 어떤 것임을 인식(認識)하고 지각(知覺)했을 것이다. 즉 불교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키고 우리 불제자의 인식의 틀을 강렬하고도 심오하게 변형시키며 지각(知覺)의 차원상승을 가져다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석가모니부처님의 친설이 맞다면 우리 불제자는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로서 경각심(警覺心)을 갖고 이 책을 읽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친설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우(杞憂)는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고도의 정묘한 불교 사상의 엑기스영약:(靈藥)만을 초출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가히 불교수행의 최고봉에 오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유행하는 인도의 요가명상에서는 몸과 마음의 정화(淨化):Purification를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 속에 존재하는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라는 3개의 마음의 성향을 잘 컨트롤하여 개달음에 이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는 경지는 불가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많은 수행자들의 한계이자 벽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큰스님게서는 이를 여실지견으로 꿰뚫어 보시고 계신다. 참고로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Kundalini Yoga나 도가(道家)의 양신(陽身):빛의 몸이라고 하는 몸 밖의 몸, 즉 체외신(體外身)은 상당히 높은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불가에서 보면 외도(外道)다. 필자는 10여년 넘게 유(儒), 불(佛), 단전호흡의 선(仙), 요가Yoga, 노장(老莊)의 도가(道家) 그리고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로 잘 알려진 헤르메스를 위시한 이집트 문명의 비전(秘傳)들, 마야문명, 힌두의 상키야 철학, 우파니샤드,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기독교 신비주의 그노시즘,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신지학(神智學):Theosophy, 뉴에이지 수행, 그리고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 등을 공부하여, 정려법사유수:사유수(思惟修), 화두선(話頭禪), 위빠사나Vipassans, 안반수의 아나파나사띠-Anapanasati, 소주천(小周天), 대주천(大周天), 연정관, 쿤달리니 각성, 샥티파티Shakti-Pati:구루로부터 에너지를 주입받음, 만트라Mantra:진언(眞言)수행, 루시니 드림:Lucid Dream:자각몽, 유체이탈, 아스트럴 프로젝션Astral Projection:아스트럴 투사, 만다라 명상Mandala Meditation, 타로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Major Arcana:대비밀 명상, 카발라의 생명의 나무 명상, 초월명상 및 동시성(또는 공시성) 현상 등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꿈속에서 환상적인 세계를 여행하기도 하고 천국과 같이 신선하고 신비한 세계도 경험했으며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한 황홀경(怳惚境),의 세계를 경험했다. 신선계(神仙界)의 기운도 느껴본 적이 많다. 아스트럴 바람이 불어오고 아스트럴체Astral Body가 우주로 투사되어 우주의 외계문명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 순간은 색욕(色慾)이 지멸(止滅)되고 매우 깨끗한 의식의 고양(高揚)을 얻은 순간이었다. 아마도 이는 20세기 정신분석학의 대가(大家) 구스타프 카를 융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 병상에 누웠을 때 그의 의식Consciousness이 지구의 자장권을 빠져나가 고요히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별을 바라보았을 때의 활홀감을 피력했던 대쿤달리니Maha Kundalini 경험에 버금가는 순수하고 깨끗한 경험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은 영원할 수 없었다. 그 체험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존재계의 이면에 거하는 어마어마한 정신세계, 즉 장대하고 영속적인 정신세계가 엄존하고 있으며 구도자Spiritual Seekers의 노력에 따라 다양한 의식적 무의식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한 순간의 황홀경이고 일시적인 환희라면 그것은 덧없는 삶과 마냥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큰스님게서 증험하신, 법신, 보신, (응)화신의 붓다의 삼신(三身)은 미래제가 다하도록 영원하다는 어마어마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 어찌 타 종교의 영성체험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붓다의 삼신설은 불가(佛家)에서는 보물중의 보물이요 전 세계 모든 수행체계와 영성차원에 있어서 지존(至尊)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성체험이 없이 사변이성으로 수행체계를 지나치게 학문적으로만 탐구하는 것은 수행에 장애가 되며, 지나치게 영성체험에만 의존하고 경전을 도외시해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진실된 불제자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행적 경험과 경전 탐구는 병행되고 겸수(兼修)내지 쌍수(雙修)되어야 한다. 물론 수행적 경험과 신비체험이 경전 탐구를 선행 및 주도해야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현 큰스님의 증험적 세계는 매우 실재적이어서 결코 사변적이 아니며 수행과 경전의 내용이 합일되고 통합되어 원융회통(圓融會通)한 가르침으로 귀일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필자 자신의 조그만신비체험을 위해서 10여 년간의 나름대로 고통을 동반한 수행을 해왔다고 자부하지만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대면하는 순간 큰스님께서 얼마나 뼈저린 수행정진을 통해 그러한 지고의 체험을 하였는가를 절실히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 수행, 염불수행이 중요합니다.”라고 말이다. 붓다라는 우주의 절대권좌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보살은 각별한 법위(法位)에 해당한다. 즉 큰스님 말씀대로 보살은 불퇴전(不退轉)이라는 사실이다. 즉, 한 번 보살이 되면 우주적으로 영원히 보살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경탄해 마지않을 일인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주옥같은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보살은 불퇴전이며 보살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융ㄱ바라밀과 염불수행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러한 보석처럼 영롱한 정문일침의 가르침들은 우리의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를 각성시키고 혜안(慧眼)을 더욱 밝혀준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는 “붓다의 법신이라는 것을 참마음(진여)이 우주 자체와 완전 계합한 초월적 이지의 광명체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가르침인가? 인도의 최고 가르침이자 티벳의 최상승 가르침으로 알려진 마하무드라Mahamudra 또한 완벽한 우주와의 계합이라고 본다. 즉, 큰스님 말씀대로 우주와의 완벽한 계합을 이루기 우해서는 법(法), 보(報), 화(化) 삼신을 구족해야 한다. 마하무드라는 지복의 깨달음, 지고의 경지, 최상의 희열이라고 일컫지만 이것으로 우주적으로 영원한 생명, 그리고 우주와 하나 되는 완벽한 깨달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지니, 수행자는 이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살과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큰삼매력이 아니면 안 된다. 백천삼매,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 수 있어야 자기의 불신을 얻고, 그 깊은 삼매력으로 생사를 자재하며 14무외력과 지혜와 자비, 항하사수의 신통을 얻고 천백억 화신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큰삼매력, 즉 마하사마디lMahaSamadhi라고 할 수 있다. 삼매의 힘이 바탕이 되어야 색욕(色慾)을 산산이 와해시킬 수 있다. 견성이나 깨달음의 증표는 바로 정신의 힘이 색욕을 압도했을 때 시작된다. 이는 견성을 한 이들은 모두 공감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매가 훨씬 더 진전하여 지극히 강화될 때 옆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전혀 미동(微動)도 하지 않고 눈도 끔벅하지 않는다고 도가(道家)의 선지식(善知識)은 전한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매가 이러할진데 하물며 최고의 종교로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백천삼매, 대적정삼매는 얼마나 고강(高强)하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큰스님이 참으로 정확하여 붓다의 경지를 논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어떻게 이러한 지고(至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에 있다하겠다.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 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정토까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信,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願, 그 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염불선行을 해 나가야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상하게 설파하신 가르침이 아니랴! 큰스님께서는 단언하시길 염불선 수행을 잘하면 극락정토까지 왕생활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지복의 법문인가? 그리고 명료하게 신信, 원願, 행行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계신다. 이러한 요긴한 가르침을 서양의 노하우-전승Knowhow-Lore 용어를 빌리자면 구도자들에게는 수행팁Tip:비법 또는 비결이라고 부른다. 고대로부터 구전심수(口傳心授)되어지는 가르침들은 대부분 수행팁에 속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곳곳에 불제자가 수행하는데 필요한 요긴한 수행팁들을 소상히 드러내 놓으셨다. 눈 밝고 지혜로운 이라면 이러한 수행팁들을 잘 간파하고 그 의미를 해득할 수 있으리라.

 

큰스님의 염불선 수행팁과 가르침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신다. “진여실상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실상염불이나 부처님 상호의 공덕장엄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관상염불은 좋습니다. 그러나 보다 좋은 것은 고성으로 칭명하는 염불입니다.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염불을 권하는 것입니다.” 여기 크게 중요하고도 요긴한 수행팁들과 가르침이 있다. 첫째는 실상염불과 관상염불의 차이에 대한 수행팁이다. 둘째는 “고성으로 칭명해야 효과적이다”라는 수행팁이다. 그리고 “염불선은 부처님이 실재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는 가르침이다. 불제자나 구도자가 수행을 할 때 진전이 없고 발전이 없는 것은 수행팁과 요긴한 가르침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 해득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하시는 가르침들에는 그냥 맹목적으로 읽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다음의 큰스님 말씀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는 《관무량수경》에서 ‘극락국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부모를 효양하고 스승께 봉사하며, 십선도를 닦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업의 기본입니다. 이 말씀에는 극락국에 태어나기 위한 요건이 상술되어 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스승을 잘 모시고, 십선도, 즉 열 가지 선함(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 양설, 악구, 기어, 탐욕, 분노, 사견을 멀리 여의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실재Reality의 양대 축인 이데아적이고 형이상학적 법설과 형이하학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잘 조화시킨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큰스님의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제자가 지향해야할 뚜렷한 비전Vision을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궁행(實踐躬行)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명료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은 더욱 실제적이다. “길 잃은 자식이 어머니를 찾듯 간절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사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큰 액운도 비켜가고, 죽을 때 잠자듯 편히 갈 수 있으며 최소한 하늘천상에 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요체는 “간절하고 간절하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는 가르침이다. 간절하다는 것은 지극히 부처님을 숭상하고 존재계의 상위존재자들 앞에서 하심(下心)을 지니라는 것이다. 존재계의 윗분들을 존숭함으로서 겸손과 겸허의 미덕을 수양하고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포용력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임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이 얼마나 보편타당하고 진지한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의 구절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불제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 함의되어 있다. “삼매에 든다면 여기서부터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삼매에 들수록 더 깊은 삼매에 들어갈수록 청정이 더해지고 지혜가 증장되며 삼매력이 생겨 죽음을 마음대로 하고 윤회에서 벗어납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역시 만현 큰스님이 친히 뼈저린 고행정진으로 실증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말씀은 감히 체험에서 우러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무릇 수행자들은 삼매에 대해서 너무 희박하게 알고 있다. 삼매에 대한 서양영성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로 단순히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깨어있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으며 어떤 현상이 전개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큰스님께서는 삼매라는 주제를 통해서 성자가 되고 청정과 지혜가 더 증장되며 더 나아가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윤회를 벗어난다고 하셨다. 이것이 진실로 삼매의 힘功:Power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삼매를 얻어야 하며 삼매를 얻으면 어떤 소식을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구도자들에게는 사실 묘연했다.

또한 여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자유자재로 마음 속의 내가 독자적으로 말을 잘 하는 정도가 되면 이제 생각을 하나로 모아 한 점 속을 뚫어 가십시오. 염불삼매로 들어갑니다.” 이 말씀은 큰스님께서 친히 증험하신 바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불삼매로 증입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점 속을 뚫어 가라”는 가르침이라고 본다. 인도의 요가체계에서는 빈두Bindu라는 말이 있다. 빈두란 점(點)이란 뜻이다. 의식이 빈두로 투사되어 빈두가 세계를 현현시킨다는 가르침이 있다. 아마 필자가 알기에 이는 점을 뚫고 지나가면 결국 새로운 세계로서의 삼매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염불선은 그 이후에도 붓다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단계를 밟아가며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세계로 진입해 나간다고 하신다.

 

한편 큰스님께서는 실제로 염불선 수행을 통해서 수많은 큰스님들이 배출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원문을 인용해 보자. “인도의 마명, 용수, 무착, 세친, 중국의 혜원, 선도, 천태, 청량, 영명, 신라의 원효, 의상, 서산, 기화, 일본의 법연, 신란 등 대선사들을 포함한 당대의 큰스님들도 염불수행을 최선의 공부법으로 권장하고 고취시켰습니다. 물론 자기들 스스로도 정토업(염불공부)에 매진한 분들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역대 큰스님들을 열거하시면서 실제적으로 염불선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셨다. 심오한 증험을 통해 붓다의 반열에 오르시고 불교사상과 전세계 수행문화에 박학다식하신 큰스님의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염불선이 왜 중요하며 왜 가치가 있고 어떻게 수행해야하는지 여실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한편 큰스님께서는 염불선 뿐만 아니라 붓다의 삼신설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 설해주셨다. 붓다의 삼신설은 그동안 승가(僧家)에서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최고의 비결(秘訣)이라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사자후하신다. “붓다를 이룬 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라 밝힙니다.” 이는 인류 최대의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최근 컴퓨터 시스템은 3계층 구조로 구축되어진다. 3계층은 바로 3단계로 처리(프로세스)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 3계층 컴퓨터 시스템은 서양철학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여기서는 붓다의 삼신)을 모사(模寫)한 시뮬라크르Simulacra에 해당한다. 즉, 부처님의 법신을 근간으로 보신이 있고 보신을 배경으로 응화신을 나툰다는 점은 인류 최대의 이기(利器)인 컴퓨터문명의 핵심 프레임워크(뼈대)로서 3계층 컴퓨터 시스템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어찌 지고한 붓다의 삼신을 현상계의 단지 하나의 미물(微物)인 컴퓨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다만 포괄적 이해를 위해서 이데아가 바로 붓다의 삼신이라면 이 이데아를 모사한 시뮬라크르가 바로 3계층 컴퓨터 시스템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강조하는 바 이러한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실재의 복사는 아니다. 다만 불가의 고승(高僧)께서 “삼라만상이 설법을 한다.” 는 이치를 올바르게 해득한다면 이 이치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핵심 메타포Metaphor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만현 큰스님게서는 삼신설은 인도의 무착, 천친 큰스님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보성론의 삼신을 들 수 있다고 하시며 여기서는 불신 곧 원만보신은 무량광, 즉 억종광, 백종오색광, 열반광으로 기로갛고 있으며 이는 맞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금광명최승왕경 제二권 3.분별 삼신품, 용수의 삼신관(三身觀), 인도의 마명 용수(주저:대지도론) 큰스님과 몇몇의 논사들 그리고 유가행(瑜伽行)학파 기타 논서(가령, 무착의 섭대승론, 견혜의 보성론) 등 붓다의 삼신설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역대 불가의 최고의 큰스님들과 그 분들의 주저(主著)들을 모두 꿰뚫어 보시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겸비하셨다는 점에 필자는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큰스님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며 사바세계에 한 분의 붓다가 나오려면 삼계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주로 선근보따리가 붓다 되기에 충분한 수행승이 낙점됩니다. 선택된 이가 바로 상품상의 보살입니다.” 이 얼마나 자세한 말씀인가? 큰스님이 자상하게 밝히신 붓다의 삼신설 내용들은 어느 하나하나 경천동지(驚天動地)가 아닌 사자후가 없다.

여기에 큰스님은 연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수행승은 공부 중에 자기를 찾아온 많은 부처님들을 뵙고 직접 법문을 듣게 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들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지도 받는 것입니다. 보다 자주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붓다로서의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심도 있게 정신계를 공부하거나 정신계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구축한 수행자 또는 구도자라면, 물론 그러한 구도자가 지구상에 드물지마는 여탕의 종교와 영성세계를 수행한 구도자건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서양의 신지학(神智學) 등에서도 모든 수행이 정신계의 스승으로부터 공부를 배워야 진실된 공부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큰스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불과를 이룬 이의 4개의 영체는 각기 독립해서 분리하여 활동합니다. 바람과도 같이 이 거짓몸뚱이에서 빠져 나와서 말입니다. 죽을 때는 4개의 영체가 자기 불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합니다. ‘지복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그 불신(원만보신)은 ‘무아 속 절대계’, 즉 상적광토에 청정법신을 둡니다. 자기의 법신, 곧 ‘우주적인 몸’을 둡니다. 이제 우주 자체(시공을 자체화함)인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큰스님께서 생사(生死)의 과정Process과 흐름 속에서 우리의 영혼체가 어떻게 변전(變轉)하는지를 여실지견으로 파악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개의 영체에 대한 설명은 힌두의 수행체계에서 취하신 것이나 원래 원시불교에서 전해져왔는데 어느 순간 유실되었다고 하신다. 이 4개의 영체에 대한 이론은 신지학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 세계에는 불신으로서 원만보신이 그리고 ‘무아 속 절대계’인 상적광토(연화장세계)에는 청정법신을 둔다는 것은 가히 큰스님이 친히 증험한 붓다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그 누가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큰스님께서 하신 다음의 가르침을 해석해 보자. “사실은 부처님의 법신이야말로 진불(眞佛)입니다. 거래도 없고 머묾도 없습니다.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명체요 초월이요, 평등입니다. 초월적 인격적 실존이신 보신의 근본이 되어 이미 인격이 아닙니다. 대우주아입니다.” 여기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이 우주적인 몸으로서의 법신이며 진불임을 소상하게 밝히셨다. 여기서 우리는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명체로서 초월적이고 평등적인 법신과 인격적 실존으로서 보신을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극명한 설명인가? 어느 누가 붓다의 삼신설에 이렇게 자세하게 증험(證驗)적 차원에서 서술할 수 있을까? 수행의 진검승부는 바로 고강한 내공으로 얼마나 고난이도의 승탑(僧塔)을 쌓느냐, 즉 자신의 내면에 최고의 경지를 구축하고 완성하느냐에 있다 하겠다.

 

더 나아가서 큰스님게서 이렇게 밝히신다. “붓다세계에 계신 불신이 보신입니다. 보신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법신을 둡니다. 그래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근본체입니다.” 이제 법신과 보신의 관계는 자명해 졌다. 법신이 체라면 보신은 용이며 보신이 체라면 화신은 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가에서 진부하게 거론되고 있던 체용철학(體用哲學)에 대한 이해가 한 순간에 통파(通把)되는 구절이라 하겠다.

《화엄경》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찬탄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에 대한 설명을 큰스님은 보다 간명하고 확실하게 적고 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희유한 사자후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선근을 지닌 모든 불제자라면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고 발심(發心)을 내어 수행정진하게 해주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추가로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법계를 두루 비추고 계십니다.”라고. 우리는 왜 시방세계와 삼천대천세계에 부처님이 두루 상주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의미를 이제야 보다 실제적으로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다음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글을 원용해 본다. “그렇듯 붓다님들은 빛으로 일체처 일체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 개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하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 참으로 희유한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구절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이라는 내용은 붓다의 삼신설의 백미(白眉)요 압권(壓卷)이다. 이 말씀에는 불제자가 만약 붓다를 이룬다면 진실되고 완벽하게 우주와 계합된 우주대아(宇宙大我)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

 

필자는 유(儒), 불(佛), 선(仙), 주역(周易), 천부경(天符經) 그리고 카발라Kabbalah, 그노시즘Gnosticism:영지주의, 타로Tarot, 신지학(神智學) 등의 각종 신비주의Occultism에서부터 스토아학파,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훗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샤르트르, 화이트헤드 등 미약하나마 동서고금의 철학, 외계문명 등의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고 나름대로 수행분야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친견해 봤지만 진실로 알곡이 되는 가르침은 그렇게 많이 대면하지 못했다. 책 한권에서 한 가지 가르침만 증득하여도 그 책은 그 책의 가치를 다 한 것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붓다를 이루신 대선지식 만현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 어느 선지식이나 책과는 다르다. 큰스님의 가르침 하나가 일파만파(一波萬波) 확장되어 필자가 알고 있던 가르침을 합종시키고 체계화하였으며 새로운 가르침들을 배태하고 잉태시켰다. 또한 이 진경(眞經)에는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가르침이 현란하고 황홀하게 펼쳐져 있으며 모두 주옥같은 가르침들이다. 특히 붓다의 삼신설과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은 그어느 종교명상수행서적에서도 대면하기 어려운 지극히 희유한 내용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희유하고 거룩한 성서(聖書)로서 전대미문의 미증유 설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제자들은 만현 큰스님의 대자대비함에 지극한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금세기 한국 불교계 더 나아가 전세계 불교계에 기여한 만현 큰스님의 업적은 불교의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불제자로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제2부의 탄생을 고대한다. 끝으로 펜으로 놓으며 만현 큰스님께서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지극히 심원한 불가(佛家)의 정수를 펼쳐 보이신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오체투지한다.

 

이 분이 대단히 공부 많이 하고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나한테 목숨 바쳐서 귀의할 것을 서원했습니다. 이 분 글을 위시해서 9명의 박사들의 주옥같은 존평의 글들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정말 객관적으로 보고 서술한 것입니다. 11월에 나옵니다.

이 책이 나오면 붓다의 메시지를 한 열 몇 군데 교정해서 9판이 나옵니다. 9판 3권씩, 존평 3권씩 전국 도서관 일단 국내 도서관에다가 약 1500권이 뿌려집니다. 여러분한테도 이 책은 기증이 될 것입니다. 법보시로, 그래서 약 출판과 홍보비용이 1억이 됩니다. 홍보를 대단히 할 것입니다. TV로도요. 해서 우리 현지사의 위상을 정립할 것입니다. 終

 

 

출처/법문집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