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의 삼행을 삼가고 지키는 것이 계율
계율은 중요하다. 계율이란 삼가고 지켜야 하고 보호해야 할 법이다. 자신의 신․구․의 삼행(三行)을 삼가고 지키는 것을 계율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음계는 계율의 중핵(中核)을 이룬다.
그렇지만 재가신도가 무조건 계율만을 지키려고 하면 삶을 원활하게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오늘날의 불교인들은 하소연한다.
그러므로 큰스님 말씀대로 정해진 부부관계인 정음(正婬)과 부부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인 사음(邪淫)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현지사 재가신도들은 모두 정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정음이란 첫째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란한 성 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부부관계를 해야 할 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때나 부부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도량이나 임금의 궁, 열녀들이 살았던 곳, 절 등에서 부부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많이 해서는 안 되며 이치에 반하는 때에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50대에 들어서면 비구(니)같이 수도 정진하여 윤회를 벗어나고 정토에 가 나려면 일체의 음행을 금해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말씀 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음계를 범하지 않아도 남이 음계를 범하도록 하거나 남이 음계를 범한 것을 기뻐하거나 칭찬하는 것음 모두 금물(禁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큰스님께서 현지사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과 같으며 <<범망경(梵網經)>>이라는 경전에도 잘 나온다. 여하튼, 우리 재가신도들은 결코 어떠한 이유를 두고서라도 음계를 범하거나 음계를 범하도록 하거나 남이 음계를 범한 것을 기뻐하거나 칭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견성(見性)을 하게 되면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바대로 만고의 적조요 광명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공간계의 변형이 일어나게 되면 순수한 청정심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므로 절대로 성 에너지라는 똥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수행의 목적은 해탈과 삼매를 얻어 자유인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유나 사유를 불구하고 음욕이나 음심으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음욕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일으키는 근원이라고 불교의 경전과 큰스님께서 친히 일러주셨다.
그러므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음욕을 단멸(斷滅)시켜야 한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음욕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존건 재가신도가 옹고집으로 음욕을 끊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마음과 부처님에 대해 귀의․귀명하고 참회․발원을 해야 한다. 음욕을 무조건 벗어나는 것이 수행자의 주된 목표가 아니라 음욕을 초탈해 나가는 점진적 과정(Process)을 통해서 진실로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전생의 죄업의 크기를 통절히 실감하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음욕(淫慾)을 끊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간절하고도 간절히 부처님 전에 참회하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믿고 정진에 정진을 더해야 할 것이다. 자력으로 음욕을 끊을 수 없다면 부처님의 위신력, 타력을 받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음계를 범하게 되면 우리 신체의 에너지 체계(시스템)이 무너지고 에너지체, 즉 영혼체가 헝클어진다. 그리고 탐․진․치에 물든 중생심(衆生心)이 마음에서 커지게 된다.
이러한 독소(毒素)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도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음계를 깨게 되면 다른 계율을 지키기 어렵게 되고 다른 계율을 범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하셨다. 또 결코 선정에 들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신다.
음계를 범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범하는 것으로 음욕과 불법은 상극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음계를 투철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진실 되고 훌륭한 인격체는 내면에 보수적인 음성(陰性)과 고요함을 간직하고 외면으로는 진보적인 양성(陽性)과 역동성을 가져야한다고 알고 있다.
자신을 다스리며 보호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외적인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현지사의 불서 > 깨달음을넘어붓다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째도 계율, 둘째도 계율이다(2) (0) | 2010.06.11 |
---|---|
첫째도 계율, 둘째도 계율이다(1) (0) | 2010.06.04 |
음계와 중계의 중요성 (0) | 2010.05.31 |
삼귀의계, 오계, 십선계 그리고 중계 (0) | 2010.05.10 |
음계를 범하는 것은 청정수에 똥물을 떨어뜨리는 격 (0) | 2010.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