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에서 삼매까지/천도대재

[스크랩] 천도재 문재

불제자 2009. 7. 31. 02:55

 

 

 

 

 

천도재 문재

 

 

 

 

인터넷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거리가 되었던 분야가 바로 천

도재였다.  이것은 사실 일의 수순이 뒤바뀐 것이다.  일을 추진

하는 데는 그 선후가 있다.  진정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으

면 큰스님 정신세계를 갖고 따져 물었어야 한다.  만약 불과를

중득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행위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바로

금기사항에 들어간다.  그 업보는 너무도 지중하기 때문이다.  그

것도 가릴 수가 없었다면 왜 그렇게 되는 지에 대하여 좀 더

세부적인 점검을 했어야 옮았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수순의 절차를 무시한 채 마치

모든 것을 검증한 것처럼 몰아세웠다.  지금도 필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그렇게 많은 불교 지식으로 자신의 의식

속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비추어 보았다면 분명 투영

된 뭔가를 발견하였을 터인데도 그런 언행을 할 수 있을까 하

는 점이다.  필자하고 불교TV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였던 분들은

필자보다 훨씬 많은 불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

의 소치인지는 모른다.

 

비용의 많고 적음을 입에 담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뿐이

다.  비용은 정성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마음 그릇을 갖고 어디

에다 판을 벌려 시비를 일삼는 것은 그 시비 자체를 유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조그만 물건을 사는 데도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업이란 다른 말로 바꾸면 결국은 빛에 불과한 것이다 얽

히고 설킨 것 자체가 빚이 아니었다면 바로 공하였을 것이다.

수 없는 과거 생을 스치고 지나갈 적에 그냥 무아였다면, 이

생에서도 얽힌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래 면목을 찾고자 할 적에 그 장애가 나타나 대가를

지불해 달라는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좀 더 깊이 본론에서 다

루어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빚은 그 가운데서도 바로 빙의

이다.

 

지난 봄 춘천 법석에서 큰스님께서 "그 당사자와 얽힌 영가

를 불러와야 하는데 허공에 떠있는 영가들은 어딘가로 숨어 버

리면 지장보살님의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

의 능력만이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툭 튀어나오는 순간 성

중들이 잡아옵니다. "라고 하신 것을 필자가 들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이 문제

되는 것이다.  영가를 수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지

난 해 불교TV 법문 때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사기행

위입니다."라고 준엄하게 법장을 내리치셨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대목과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빠져있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결국은 부처님 신통

으로 천도 된 일을 묶어서 생각해 보면, 천도라는 것은 본래부

터 붓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이 말을 쉽게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필자가 현

지사의 천도재를 살펴본 바로는 영산 시절의 목련존자 어머니

천도와 그  절차나 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 천도재 문제

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던 부분이므로 본론에서 필자의 생각

을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한다.

 

자재 만현 큰스님을 탐구함에 있어 큰스님께서 제창한 칭명

염불의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천도재에 있다.  이

것을 단순하게 기존의 재의식의 하나로만 바라볼 경우 현지사

의 칭명염불의 수준 또한 기존의 염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현지사의 수행 과정이 바로 여기에서 시

작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결론에 이르게 된 동기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감을 잡았고, 불교TV를 비롯한 여타의

자리에서 설하신 테이프 등을 통해서 그렇게 결론을 맺어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그동안 간화선이나 염불

등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수행을 일삼은 체험자들의 입담을 통

해서 마무리하였지만, 다시 한 번 사실 확인을 위하여 큰스님

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불교사상을 연구해 보면 부처님께서 그

렇게 강조하신 것인데....." 라는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재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천도재와 효의 함수관계는 누구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이다.  여기에 불가와 유가가 개입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

혀 없다.  이미 천도재에 대해서는 송대나 조선시대

에 유생을 자처하는 자들일지라도 다수가 공유하였던

것이므로 굳이 사족을 붙여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효'라는 것은 동양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다.  동서고금

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로서 자리매김 되어 온 보편

적인 가치관일 뿐이다.  중국 유가에서 효를 거론하며 마치 유

가의 고유한 사상의 근저인 것처럼 포장해서 도가나 불가 등을

싸잡아 공격한 것은 분명 억지이다.

 

가치관이란 것은 어떤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 상황

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정된 어떤 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폭을

상실한 것이므로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에서 인을 구하는 문제나 불가에

서 자성을 찾는 과정에 무엇 때문에 굳이 조상을 끌어들

여 효를 논해야 되느냐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첨예하게

대립된 전국시대의 사상 논쟁에서도 이미 제기된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모두가 선으로 받아들인 인이란 것을 어

떻게 실천하느냐는 방법론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 간다"라고 맹자가

한탄하였던 것은 유가의 설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러나 그 이후 양묵의 세는 사라지고 유가의 사상은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심성에 뿌리를 둔 유가의 보편성

에 있었던 것이다.  인의 실천은 자신을 기준해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친친인야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가의 한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보는 것까지는 그 인식에 있어서 씨앗을 거두었지만,

그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이것은 경지의

한계이므로 누구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출처 :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
글쓴이 : 연 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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