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인도 땅에서 망한 이유
오늘은 우리 불교가 인도 땅에서 사라지고 멸망한 이유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이건 꼭 알아야 됩니다. 우리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후 약 1700년~1800년 동안 인도 땅에서 힌두교와 함께 쌍벽을 이루면서 그 교세를 신장해가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스님이 우리 불교가 인도 땅에서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 1년 전엔가 간단히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도대체 그 위대한 불교가 왜 그 너른 땅, 10억이 사는 인도 땅, 그 인구, 민중들을 모두 교화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는가?
이 부분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됩니다. 800년 전, 그러니까 A.D. 12세기입니다. 이슬람군, 이슬람교도, 무슬림, 이 포악한 군대에 의해서 그 유명한 중인도의 나란다 사원이라든지 비끄라마쉴라사원 등이 쑥대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학승들이, 또 스님들이 무차별 죽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불교는 인도 땅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 오랫동안 절에 다니면서도 이런 것을 생각 안 해보셨지요? 이 인도불교의 역사를 잘 모르지요? 여러분! 모르시지요? 그러면 불교가 망한 이유가 회교도의 침입일까? 아니면 또 어떤 무슨 원인, 요인이 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한테 말씀을 올립니다. 우리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불교대학 나오신 분들, 동국대 불교대학 나오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내 법문의 내용은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색깔이 다를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 오신 분들, 스님의 법문이 조금 어렵다 하더라도 끝까지 들으시면 와 닿을 것입니다. 또 불교용어가 섞여있고, 그것을 부득이 해석할 시간이 없으니까 여러분들한테 쉽게 쉽게 말씀 올리도록 하겠지만, 약간 어렵다 하더라도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멸망했다? 망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었답니다. 흡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슬림,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이 결정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되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다른 데에 있다고 봅니다.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
‣첫째, 아트만(atman)을 부정한 점이었다. 여러분, 이 말을 못 알아듣겠지요. 불교가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을 부정한 점 때문에 불교가 망한 것이다. 불교가 힌두교로 흡수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그쪽 이슬람교도가 침입하면서 우리 불교만 그렇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고, 인도의 힌두이즘(힌두교), 또 자이나교도 불교만큼 피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힌두교와 자이나교)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의연하게 살아났어요. 그런데 왜 불교만 망해버렸느냐 그거지요. 그래서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트만(atman)을 부정한 데 있다. 아트만(atman)을 부정한 점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아트만(atman)이라는 것은, 힌두교는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소멸되버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체(本體)가 있다. 본체가 있기 때문에 업을 지어서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다. 일찍이 그렇게 봤습니다. 윤회한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하늘, 이 여섯 세계. 우리 불교처럼 육도를 완전히 보지는 못하지만, 윤회한다. 그런데 이 윤회는 대단히 고통스럽다. 여러분, 윤회하는데 대단히 고통스럽지요? 태어나게 되면 늙어야 되고, 병들어야 되고, 죽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윤회에서 해탈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윤회사상이 대단히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힌두교는 당시에 브라만교(브라흐마니즘)라고 했습니다. 브라만교라고 해서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저쪽 중앙아시아의 '아리아'라고 하는 인종이(종족이) 인도를 침입하여 자리 잡으면서 네 가지 ‘베다’를 만듭니다. 힌두교의 유명한 성전이지요. 그래서 철학을 정립해가지고 인도 땅을 석권한 거예요. 그 베다서,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리한 것이 ‘우파니샤드’인데, 거기에 주로 윤회사상이 깔려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윤회사상을 철저히 믿습니다. 철저히 믿습니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죽으면 여섯 세계 중에 한 세계로 간다. 또 거기서도 명을 다해서 살면 또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또 태어난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것을 계속 반복한다는 거예요. 여섯 세계를 윤회하면서 반복한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이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윤회한다고 하면 몸 속에, 여러분의 몸 속에, 우리들의 몸 속에 뭔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본체가 있어야 된다 그거라. 영원히 죽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어야 된다 그거라. 그래야 윤회한다는 거예요. 본체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해서 그 사람들은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실체, 진짜 자기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힌두교가 아트만(atman)에 대한 신앙은 대단합니다.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기원전, 그러니까 BC 6세기~5세기, 설이 많습니다.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분이 태어났어요. 지금의 저기 인도와 네팔 국경 근처의 카필라국에서 왕자로 태어났어요. 아주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지금 이 위대한 분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우리 부처님처럼 위대하신 분은 천상천하에 없어요. 나는 그것을 확신해요. 다른 외도(外道), 많은 외도들이 있지요. 그 교주 수장들, 비교가 안 되어요. 내가 불과를 이루고 보니까 그것은 비교가 안 되어요. 그런 위대한 분이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어요. 어떤 설에는 3000년이라고도 합니다.
그 부처님이 왕의 자리를 마다하시고 수행의 길로 들어가요.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서 수행을 하셨어요. 그것 아시죠? 35살 때 깨달음을 얻어요.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은 지금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과 다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하는 거예요. 정각(正覺),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지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신 거예요.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그보다도 ‘다시 불과를 증하셨다. 또 다시 오셔서 부처님이 되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45년 동안 중생교화를 다 마치고 반열반에 드셔요. 돌아가셨다는 말이어요. 반열반에 드셔요. 그것을 여러분은 잘 아시죠? 많은 법문을 하시고, 이제 그분은 반열반에 드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중인도에 위치한 '마갈다국'까지 오셔서 공부하셨잖아요. 거기서 도를 이루셨어요. 제자들이 열심히 서쪽으로 남쪽으로 포교를 합니다. 그 영향으로 부처님 가신지 200여년 만에 아쇼카대왕(아육왕阿育王)이 출세하는데, 그분이 대단히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었어요. 그 때문에 아쇼카대왕이 전인도를 통일하면서 불교를 폈어요. 그래서 아쇼카대왕 때에는 ‘전국토가 불교화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불교의 교세가 그렇게 무서웠어요. 그 당시 그 불교가 저쪽 파키스탄을 넘어, 이라크와 이란을 넘어, 지중해 저쪽 그리스까지 간 거예요. 그리스까지 포교사를 보낸 거예요. 지금의 불교가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데, 문제가 부처님 가신 지 100년쯤 되면서 파가 갈라져요. 분파가 되어요. 여기서부터 이제 슬픈 역사가 시작됩니다. 조그마한 문제가지고 율장(律藏)을 해석하는 차이로 분파가 됩니다. 그것이 300년~400년 만에 20개 정도로 찢어져 버린 거예요. 20개 정도로 분파가 되어버린 거예요. 이것을 ‘부파(部派)불교’라고 합니다. 그때 돈 있는 사람, 나라의 왕들이 경제적으로 후원해가지고 스님들이 그 깊은 사원에 들어가서 많이 공부를 합니다. 교학을 공부했어요. 많이 공부를 해가지고 부파불교 각 부파마다 삼장(三藏)을 모두 갖추려고 했어요. 경‧율‧론 삼장을 다 갖추려고 그렇게 연구를 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불교' 그러면, '불교사상' 그러면 삼법인(三法印) 혹은 사법인(四法印) 할 거예요. 불교사상을 한마디로 말해서 삼법인 내지 사법인 그래요. 왜냐?
이 세상은 참~ 무상하더라. 허망하더라 하는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해. 이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해. 그리고 이 세상은 고해(苦海)더라. 고통 근심걱정이 떠날 날이 없어. 고통스럽다 그 말이어. 이 세상뿐만 아니라 중생세계가 그렇더라 그거예요. 하늘세계도 죽는 고통이 있다 그거요. 복이 다하면 다시 지옥이나 사람으로 떨어져버리는 그런 고통이 있단 말이어요.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잖아요. 그 다음에 제법무아(諸法無我)그럽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무슨 말이냐? 모든 법이(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다 인연으로 이루어졌더라. 인연으로 이루어져 가지고 드러났다. 인연으로 생겼단 말입니다. 우리의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가지가 모여가지고 몸뚱이를 이룬 것 아닙니까? 모든 물질이나 정신까지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졌다가 그것이 다하면 흩어져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실체라는 것이 없다. 그 속에 실체라는 것이 없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버려. 흩어져버리니까 그 속에 고정되어 있는,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이게 무아(無我)예요. 제법무아(諸法無我)예요. 모든 법은 그렇다.
그런데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사는 중생이 사는 현상계, 현상계가 그렇다는 말이에요. 현상계가 그렇다 그거예요. 이 현상계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밟잖아요.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데, 이 우주는 성주괴공을 해요. 이렇게 태어났으면 없어질 때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주괴공이라고 그래요. 이 우주도 자꾸 성주괴공을 반복합니다. 사람은 생로병사를 반복해요. 육도를 다니면서 윤회하면서요.
우주는 성주괴공을 해요. 성주괴공을 반복하는 데는 반드시 본체(本體)가 있어야 된다 그거예요. 본체가 없이는 성주괴공을 계속할 수가 없는 거예요. 1회에 한해버려야 되는 거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생로병사를 무한히 반복합니다. 무한히 반복한다면 본체가 있어야 되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atman)이 있어야 된다 그거예요. 아트만(atman)이 있어야 된다 그거라. 본체가 있어야 된다 그거라.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는 부파불교에서부터 그걸 생각한 거예요. 부파불교에서 무아를 이제 정리합니다.
무아(無我)의 뜻을 정리하는데, 무아(無我)를 잘못 해석하기 시작했어요. 자,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지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버리니까 공(空)이 되어버린단 말이에요. 그러니 실체가 없잖아. 실체가 없잖아요. 이것을 갖다가 어디까지로 해석을 하느냐 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현상계 배후에는 현상계를 성립시키는 본체가 있어. 본체. 본체계에는 현상계의 나(我)를 있게 하는 진짜 나, 진아가 있어. 무아를 해석할 때 이 진아(眞我)까지도 부정을 해 버리는 거예요. 본체계의 나(我)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 안 해버렸어. 그래서 무아(無我)다. 나(我)가 없다. 나(我)라는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은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일시적 존재일 뿐 실체는 없는 것이다. 당신도 없고 너도 없고 나(我)라는 것이 없어. 이렇게 해석해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석해 가다가보면 부처님도 없고 보살도 없고 하늘사람도 없고 귀신도 없고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고... 이렇게 되어버려요. 윤회도 없고 영혼도 없고 자아도 없고...이렇게 나가버려요. 지금까지도 부처님의 무아를 말씀하신 뜻을 이렇게 해석을 해오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석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힌두교하고 부딪칠 수밖에 없어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내세우면서 무슨 소리냐? 사람이라는 내 속에 주인공이 거(居)한다고? 산다고? 말도 아니지. 무아(無我)인데? 무슨 실체가 있어? 무아인데 무슨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 이렇게 해가지고 부딪힌 거예요.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게 문제가 돼. 불교에는 무아(無我), 힌두교에서는 유아(有我). 유아와 무아의 논쟁, 여러분! 좀 더 깊이 말씀드리는 것은 접어두겠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6세기~8세기를 걸치면서 논쟁이 굉장히 불이 붙었어요. 힌두교(브라만교)가 부처님이 탄생하면서, 자이나교가 나오면서, 기타 여러 비정통 사상이 나오면서 이제 그 위세가 꺾입니다. 브라만교는 힌두교의 전신이지요. 브라만교는 동물을 잡아서 동물의 피를 뿌리는 등의 의식을 하면서 제사를 지내요. 그걸 제식(祭式)이라고 해. 그리고 사람에게는 양반 상놈이 있듯이 네 가지 계급이 분명히 있다고 그래요. 인도 국민은 그 생각이 대단히 깊습니다. 4계급(카스트, caste) 그러니까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족ㆍ전사), 바이샤(상인ㆍ농민), 수드라(노예) 그러는데, 거기는 이 네 계급이 엄연해요. 엄격해요. 제일 위의 계급이 브라만입니다. 이러한 것이라든지, 동물을 잡아가지고 제(祭)를 올린다든지, 이런 것을 부처님께서 굉장히 못 마땅해 하셨어요. 이건 법이 아니다 그거예요. 제를 지냈어. 그때는 브라만교가 제를 지내가지고 소원을 이룬다고 생각해서 제식만능이 되었었어. 제식만능(祭式萬能)이다는 거예요. 병이 와도 제(祭)를 터~억 지내면 낫고, 사업을 성취하려고 해도 제를 잘 지내면 사업성취가 되고, 도를 통하려고 해도 그런 목표로 소원을 걸고 하면 되고 하는 등 제식만능의 시대가 있었어요.
자이나교도 그러지만, 우리 불교에서도 불살생이니까 이것을 부정한 거예요. 그런 점이 있지만,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아트만(atman) ․ 유아(有我)에 대해 불교에서는 ‘아니다! 무아(無我)다!’고 한 거예요. 이렇게 나갔던 거예요.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논쟁이 대단히 첨예하게 벌어진 거예요.
인도 사람들로서는 가만히 들어보니까 불교의 논리가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아. 자기 종교(힌두교)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 맞아요. 그러니까 점점 불교의 세력이 더더욱 뻗어가야 되는데, 점점 더 움츠려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브라만교가 나중에는 힌두교로 명칭을 바꿉니다. 바꿔가지고 불교에서 많이 배워 간다고요. 불교에서 주장하는 착하게 살고, 계율도 잘 지키고, 그리고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그러면 깨달음을 얻어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이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많이 배워요.
그래가지고 7~8세기 쯤에는 많은 힌두의 여러 철학 학파의 유수한 학자들이 힌두교를 이제 사상적 철학적으로 정립해서 불교의 약점을 파고 들면서 공격하는 거예요.
▸첫 번째 공격이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지금까지도 이 무아설을(무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망했는데 이걸 못 버리고 있어요. 무아를 잘못 해석한 거예요. 잘못 해석한 거예요.
무아(無我)는 뭐냐? 우리 부처님은 중생이 육도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을 아셨어요. 불과를 증하셨는데 그것을 왜 모릅니까? 더 들어가. 더 들어가보면, 업을 지으니까 나쁜 죄를 지으니까 온갖 고통이 오거든요. 이게 맞아요. 업을 지으니까 온갖 과보가 따르고 고통이 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업은 왜 짓느냐? 왜 업을 짓는 것이냐? 이것은 탐진치, 그 원인은 탐욕과 애착이다 그거예요. 이제 마음으로 들어가 가지고 살펴본 거예요. 우리 불교가 한 차원 깊어요. 업을 짓는 원인은 탐욕과 애착이다. 욕심이다. 욕심에서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면 욕심은 또 어디에서 나오느냐?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我)라고 하는 생각에서 온다 그거예요. 나(我)라고 하는 생각에서 온다.
이 몸뚱이를 나(我)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그거예요. 이 몸뚱이는 내 것이 아닌데, 나(我)가 아닌데, 나(我)가 아니어. 내 것이 아니어. 이게 무아(無我)의 뜻이어. 이것을 비아(非我)라고 그래. 몸뚱이는 나(我)가 아니어. 이것은 인연이 다해서 흩어져버리면 없어져버리는 것이어. 이 생각도 그래. 생각도 인연 조건, 인연이 다하면 금방 다른 생각으로 바뀌잖아요. 이 생각, 여러분의 그 생각, 마음 그리고 이 몸뚱이, 이건 나(我)가 아니다. 나(我)가 아니다. 나(我) 아닌 것에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 나(我)아닌 것에 대해 나(我)라고 집착하는 데서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불교에서 나(我)라고 하는 생각을 없애라. 그러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여. 그런데 그 후 무아(無我)를 잘못 해석해 가지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보살도 없고 천인도 귀신도 전부 없고...’ 이렇게 엄연히 있는 존재를 갖다가 전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 버린 거예요. 이건 크게 잘못 해석한 거예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힌두교는요 힌두교도들 뼈속 깊이까지 윤회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윤회하는데는 본체가 있어야 된다는 아트만(atman)사상이 깔려있어요. 이건 어느 힌두교도 그 사상은 다 철저해요. 철저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는 말이 나왔단 말이에요. 무아가 아주 핵심이어요. 불교의 핵심사상인데, 이 무아(無我)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어. 네가 없다는 것이 아니어. 나(我)라고 하는 생각, 소아(小我)적인 생각, 중생적인 생각, 이기적이고 무명에 가리워진 생각, 그 나(我)라는 생각을 없애라.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니까. 이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이 생각도 내가 아니고, 이 마음도 나(我)가 아니다. 그러면 나(我)라고 하는 진짜 나(我)는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찾는 것이 불교예요. 진아(眞我)를 찾는 것이 불교예요. 이것은 적어도 대보살이나 붓다의 경지에 가서 불안(佛眼)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이 맞아. 여러분 속에 여러분의 주인공이 있어. 맞는 거예요. 여러분의 주인공이 있어.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이 주인공을 더욱 자세하게 관(觀)해보니까 4개로 이루어져 있어. 4개로 겹쳐져 있어. 그래서 1번 영체, 2번 영체, 3번 영체, 4번 영체를 이야기 한다고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atman)만 말해요. 아트만(atman)만 말해. 아트만(atman)은 우리 영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1번 영체와 거의 같은 개념인데, 그러면 1번 영체는 뭐냐? 여러분, 이것도 알아야 돼.
여러분은요, 나는요 나(我), 생각하고 행위하는 순수한 나(我), 그 나(我)가, 당체인 그 ‘나’가 저기 본체인 공(空)과 함께 하면서 역사를 같이 해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같은 나이다 말입니다. 나이가 하나님과 같아. 본체인 공(空)과 같은 나이로 보면 돼. 무시 전부터 나(我)가 있었어요 여러분. 무시 전부터 나(我)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우주는 성주괴공을 하잖아요.
우주가 성겁으로 들어갈 때, 우주가 성겁이 될 때, 우주가 생성될 때, 태어날 때 그 나(我)가 튀어나옵니다. 현상하게 돼. 튀어나오면 어떻게 되느냐? 이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갖춰지지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몸뚱이가 있게 되어 있어. 그럴 때 이 본체인 공(空), 본체인 공(空)은 우주에 변만(遍滿)하니까 본체인 공(空)과 나(我)가 합쳐져 가지고 있다가 안이비설신의가 갖춰져 1번 영체를 형성한 거예요. 1번 영체를 형성한 거예요.
그런데 아트만(atman)은 이 1번 영체와 거의 같은 개념인데, 범(梵, 브라만) ․ 본체인 공(空)이 만물을 다 창조했다 그거라. 그래놓고 창조한 모든 사물, 사람이라든지 모든 만물에 들어가버렸다 그거예요. 이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해. 그러니까 1번 영체가 막 시작할 때 그것이 아트만(atman)입니다. 거기를 아트만(atman)이라고 해. 그런데 아트만(atman)만 이야기했지 우리 영산불교에서처럼 2번 영체 ․ 3번 영체 ․ 4번 영체를 이야기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트만(atman) 가지고는 윤회를 못하는 거예요. 이 아트만(atman)을 자기들이 이야기하는 바로는 순수하다고 그래. 지고(至高)하고 순수하고 생각도 없고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그래. 본체인 공(空)이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윤회합니까? 이건 윤회 못하는 거예요.
1번 영체가 본체인 공(空)에 있다가, 자기의 당체가 현상할 때 튀어나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본체인 공(空)과 합해져가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안이비설신의가 구족 된다고요. 이때부터 이놈이 업을 짓는 거예요. 의업(意業)을 짓는 거예요. 생각의 업을 짓는 거예요. 그래서 2번 영체가 생기고, 3번 영체가 생기고 사람으로 까지 오는 거예요. 윤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윤회의 주체는 1․2․3번 영체예요. 이렇게 되어야 윤회를 하는 것이지 아트만(atman)갖고는 윤회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영산불교에서 앞으로 힌두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힌두교처럼 오묘한 사상을 지닌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힌두교는 영산불교에 비하면 아닙니다. 훨씬 아래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힌두교의 약점을 여기서 여러분한테 들춰내는 시간은 아니지만, 힌두교에서는 저 위대한 부처님을 모릅니다. 힌두교에서는 ‘무아속 절대계’를 모릅니다. 기껏 안다고 하는 것이 8지(支)의 요가를 통해서, 또 나아가 나중에는 쿤달리니 요가를 통해서 이를 수 있는 법위가 윤회를 벗어난 정도까지는 되요. 윤회를 벗어납니다. 그 정도까지는 가요. 이렇게 해서 얻은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야. 법아일여라고 그래. 분명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데 까지는 가는 종교예요. 대단한 종교지요. 그러나 윤회를 벗어난 이후의 적멸의 세계를 몰라요.
우리는 윤회를 벗어난 세계를 아라한의 세계라고 해요. 더 가면 무루대아라한의 세계라고 그래. 자세히 말하면 많은 계층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더 가면 이제 극락이 있잖아요. 보살이 가는 정토세계가 있잖아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의 세계, 니르바나 세계가 있어요. 이 극락세계가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대단히 많아요. 또 극락세계보다도 더 법위가 높은 극락세계가 있어요. 약사여래부처님의 세계가 있어요. 거기서 이제 수행을 해서 27품을 다 지나면 ‘불격을 갖춘 최상수보살’이 되어요. 거기서 더 가야 붓다가 되는 거예요. 붓다가 되면 붓다가 머무는 자리 무아속 절대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이걸 전혀 몰라요. 윤회 밖의 세계를 우리 영산불교처럼 해박하게 몰라요. 우리는 인간 영혼의 실체에 대해서, 방금 말씀드렸듯이 영혼체가 있음을 알았어요. 이게 주인공이어요. 그런데 선(禪)불교에서는 주인공이라는 용어를 본체인 공(空)을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그거 아니어요. 본체인 공(空)은 본체인 공(空)일 뿐이어요. 힌두교에서는 그걸 범(梵)이라고 해.
주인공은 1․2․3번 영체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뭉쳐 다니고 죽지를 않아요. 이게 진정한 주인공이고, 4번 영체는 짐승이나 사람 몸을 받아갈 때 4번 영체가 육신과 함께 자라요. 그러다가 죽어 명부에 들어가게 되면 이 4번 영체는 들어갈 수 없어요. 조건이 맞지 않으니까, 환경이 맞지 않으니까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 분리된 4번 영체는 몇 년 있다가 죽어버려요. 1․2․3번 영체는 항상 뭉쳐 다녀요. 그래서 하늘을 갈 때는 3번 영체가 주가 되어요. 밖으로 나와요. 성중하늘을 갈 때에는 그러니까 색계천이지요. 거기에 갈 때에는 2번 영체가 주인공이어요. 3번․1번 영체는 2번 영체 속에 겹쳐져 있어요. 극락 갈 때에는 1번 영체가 가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대단히 깊은데, 어쨌든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아트만(atman)을 넘어서 2번 3번 4번 영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훨씬 더 자세하고 깊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그걸 모른다. 아트만(atman)만 가지고 이야기한다. 아트만(atman)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아트만(atman)을 부정한 것은 크게 잘못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無我)는 그 뜻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 속에서 고생하는 저 중생들을 보고, 그 고통에서 건지고자 하셨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 근원적으로 나(我)라고 하는 생각을 없애야, 극복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나(我)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잖아요. 나라는 생각 때문에 탐진치가 일어나잖아요. 탐진치가 일어나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일어나잖아요. 이것 때문에 업을 짓는다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업을 짓는다 그거예요. 힌두교에서는 여기서부터 이야기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깊이 들어가 가지고 나(我)라는 생각을 없애라는 의미에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이제 그것을 알아야 되요. 이게 부처님의 뜻이에요. 여러분, 아주 중요한 대목이에요.
그러니까 부파불교 당시에 우리 영산불교가 있었더라면 힌두교를 가르쳤지요. 가르치지요. 깊이 가르치지요. 처음에는 범(梵)을 비인격으로 봤습니다. 비인격으로 봤는데, 어떻게 해서 만물이 창조되느냐? 창조한 만물에 어떻게 자기가 또 들어가느냐? 이러한 설명을 못해내니까 나중에는 이 범을 인격화시킨다고. 이 범을 인격신과 동일시한다고. 그런데 인격이라고 하면, 인격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창조하기 이전의 과거는 없어야 되지. 그러나 우주는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있잖아요.
이 지구의 역사는 45억년이고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이어. 이것이 또 언젠가는 공(空)으로 되어버릴 때가 있단 말이에요. 공겁(空劫)에 들어가서는 공(空)으로 되어버린단 말이어요. 공겁이 되어가지고 성겁이 될 때에는 다시 또 이 우주가 생겨난단 말이에요. 우주가 생겨나면 사람을 비롯해서 온갖 유정이 생겨나고 만물이 생겨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성주괴공을 반복한단 말이에요. 성주괴공을 반복해.
우리 부처님께서 고(苦)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찾은 거예요. 고(苦)로부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신 거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찾으신 거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법을 찾았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이 육신은 80년 100년 밖에 못 사는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이냐?
앞에서 진짜 주인공이 영혼체라고 했지요? 1․2․3번 영혼체라고 했지요? 그놈이 수행을 통해서 착하게 살면, 또 수행을 많이 하면, 그 영혼체가 청정해져 갑니다. 깨끗해져 갑니다. 그런데 이 중생들은,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체는 온갖 업을 지으니까 대단히 탁해요. 탁해. 심지어 숯덩이처럼 탁한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들은 지옥을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착한 사람이 되어서 십선도를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보살행을 많이 하고 그러면 닦아진단 말이에요. 그 선업의 힘으로 탁한 것이 오염된 것이 씻어나간단 말이에요. 씻어나가는데, 부처님한테 여러분이 매달리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은요 큰 능력을 지니고 있어요. 불과를 증한 분은, 부처님들은 큰 능력을 지니고 있어요. 왜냐?
붓다는, 불과를 증한 분은 우주의 본체인 공(空)과 하나가 되어 버려요. 어떻게 해서 하나가 되느냐? 빛 중에서도 아주 밝은 빛이 태양빛이잖아요.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이 있어요. 여러분이 이제 도를 통하면, 화두타파하면 드러나는 빛은 태양 빛보다 더 밝아요. 이를 자성광(自性光)이라 합니다. 그런데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면 그것과 비교가 안 되는, 중생이 보면 까무라쳐 죽어버리는 잿덩어리가 되어 버릴 수 있는, 그 무량광이라는 빛으로 붓다는 이루어졌어요. 그 빛의 세계로 들어가야 되요. 그분이 붓다예요.
불과를 증하면 절대계에 안이비설신의를 딱 갖추고 있으면서 빛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량광이라고 하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빛은 너무너무 밝기 때문에, 강도(强度)가 엄청나기 때문에, 우주의 본체인 자성광 빛 원초의 빛을 먹어버려요. 순식간에 먹어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우주의 진리를, 우주의 체를, 우주를 갖다가 내 것으로 해버렸다는 말이에요. 합쳐버린 거예요. 완전히 내 것으로 해버린 거예요. 그런 정도니까 부처님은 우주적인 능력을 쓰는 거예요. 우주적인 능력이 있어요. 특히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불과를 증한지가 나유타겁 하고도 아승지겁 이전이어요.《법화경》에 나와요. 셀 수 없이 아주 오래전에 성불하신 분이어요. 원래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원래부터 부처는 없는 거예요. 태고 태초의 부처님은 없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중생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공(空)에서 자기의 순수 당체가 튀어나와 가지고, 그래서 안이비설신의가 구족되면 본능적으로 욕심이 생겨요. 그래서 업을 지으면 2번 영체, 3번 영체, 4번 영체가 생기고, 업을 짓고 업을 짓고 윤회하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다겁생을 하다가 보니까 내가 짊어진 업장이 수미산만 해요. 어떤 사람은 수미산만 해. 어떤 사람은 업장이 집채덩어리만 해. 이것이 다 없어져야 되요. 이것이 다 닦여져야 돼. 이것이 다 씻어져 가야 돼. 그러면 그 영체가 아주 청정해. 그 찌꺼기가 다 빠져버리면 청~정해. 청정한 위치가 윤회를 벗어난 위치예요.
그런데 청정 청정한 거기에서 또 부처님의 그 무량광으로 씻기고 퍼붓고 하는 부처님의 작업이 있어요. 어마어마한 작업을 해주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보살을 만들어요. 보살이 백천만겁 보살행을 해서 이제 ‘이 선근정도면 붓다 되겠다’ 하면 부처님들이 붓다를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붓다를 만들어 주실 때 그 사람의 영혼체는 빛덩어리가 되어요. 여기 이 몸뚱의 속의 영혼체가요. 또 절대계에 자기의 부처, 불신이 생기는 거예요.
그건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영혼체와는 다른 자기가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런 깊은 비밀이 있는데요, 그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이제 열반에 들면 자기의 4개 영혼체가 자기 불신(佛身)으로 합해져 버려요. 그럴 때의 능력은 어마어마해요. 그런데 최초불인 우리 석가모니부처님은 그 많은 부처를 내고 보살을 낸 그 위신력과 지혜와 능력이 있으셔서 정말로 무시무시해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불, 비로자나불이라고 그러지요. 진불(眞佛), 비로자나불은요 불과를 증한 분이 이 세상에 나올 때 한 달에 한 번씩 뜨게 되어 있어요. 현지사에서는 초하루 날 뜨잖아요. 비로자나불이 뜨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삼계의 붓다님들이 그 보신불이 다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려요. 그 비로자나부처님의 위신력은 또 말할 수가 없어요.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몇 살 먹었느냐? 여러분! 몇 살 먹었느냐? 몇 살 먹었다고 해야지? 본체인 공(空)과 같이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창조론은 틀린 거예요. 창조론, 창조했다고 하면 창조 이전은 없었어야지. 기독교에서 봅시다. 아담과 하와(이브)를 만들고, 우리가 그 자손이라고 해. 아담과 하와를 언제 만들었느냐? 기독교 성서로 따져 계산해 보면 7000년도 안 된다 그거예요. 우주만물을 창조한 지가 1만년도 안 된다 그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도 과학의 힘으로 많은 것을 알아냈잖아요. 우리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 것으로 보면 수 십 년, 수 백 만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주가 성주괴공을 하기 때문에 그전 성주괴공 때, 그리고 그전 성주괴공 때...이렇게 셀 수 없는 무시겁 나유타 아승지겁 전에 여러분이 계셨다니까요. 여러분이 공(空)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윤회하고 있다니까요. 미래제가 다하도록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윤회를 계속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어서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이 창조론은 말이 맞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창조론도 말이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힌두교의 창조론은 말이 안되는데, 아트만(atman)설도 그럽니다. 아트만(atman)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초에 생성된 제 1번 영체, 그게 아트만(atman)이어.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뚱이는 죽더라도, 나(我)라는 주인공은 수행에 의해서, 보살행에 의해서, 다겁생으로 수행하고 보살행을 닦는 공덕에 의해서 지혜를 얻고 해서 우주의 진리와 하나로 계합 되어버렸다. 영혼체가 그렇게 발전하고 성숙해서 우주의 진리와 하나로 합일이 되어버렸다. 이랬으니까 이 영혼체의 생명은 영원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더 빛으로 빛으로 빛으로 씻어 주고, 부처님께서 씻어주고 씻어주고 업장을 다 소멸해 주고 해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게끔 해왔으니까 우리 현지사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길,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길을 찾은 거예요. 여러분들에게 제시하는 거예요. 불교는 그거예요.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길입니다. 그것이 자력이든 타력이든, 그런데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데는 자력으로는 안된다. 내가 여러분 법문했습니다.
우리 불교가 인도에서 활약한 것은 2500년 설을 따지자면 기원전(BC) 약 6세기~기원후(AD) 10세기 경, 혹은 무슬림에 의해서 외형적으로 망한 것이 12세기이니까 1700년 혹은 1800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오래 동안 우리 불교가 인도 땅을 석권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망한 것이 아니어요. 이 망한 이유가 힌두교의 아트만(atman) 교설에 당한 거예요. 우리 불교가 그 부파불교에서 논사들이 많이 나오고, 그 후에 대승불교가 나오고 밀교가 나오고 했지만 힌두교의 교설에 당한 거예요. 이거 이거 당할 수밖에 없어요.
부처님의 무아를 잘못 해석해가지고 그릇된 이 무아(無我)에 집착해가지고, 무아(無我)가 ‘영원히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되어가지고 나중에는 이제 이 진리에 위배되면 외도니까, 그 진리에 합당한 논리를 내놓다가 보니까 온갖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리가 부파 불교에서 막 나온 거예요. 나중에 대승으로 와서도 유식에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다 하는데...뭐 이런 것은 다 아니어. 식(識)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어. 무아와 윤회를 모순되지 않게 설명하려는 하나의 방편일 쁜이지. 식(識)이 어떻게 극락에서 ‘햐!~ 살기좋다’ 그러겠나?
눈이 있어야 되고 귀가 있어야 되고 마음이 있어야 되고 몸뚱이가 있어야 ‘햐!~참 좋다! 이거 절경이구나!’ 하지. 식(識)이란 놈이 어떻게, 추상적인 식(識)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됩니까? 이건 말도 아니어. 이거 지금의 불교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불교가 지금 이렇게까지 흘러갔다고. 그런데 뭐 유식 찾고 중관 찾고...뭐 아주 그 철학이 심오하다고 하는데, 이거 지금 큰일 난 거예요. 심오하다는 것에 빠져서 더 중요한 진실을 보지 못하면 이거 큰일 나는 거요. 이렇게 가면 이 불교는 절대로 21세기를 향도 못합니다.
지금 인도 땅에서 불교가 많이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대단히 좋은 일이지요.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을 한 분이 있어요. 천민출신인데, 그분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그분의 이름을 아십니까? '암베드까르'입니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년 4월 14일 ~ 1956년 12월 6일)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참여인권운동의 선구자, 인도불교의 부흥자, 정치인, 대학교수, 영국 변호사 이다. 인도의 불가촉천민(달리트)들의 권익을 위해서 불가촉천민 식수권 운동, 불가촉천민 분리선거 운동, 집단 불교 개종운동을 이끌었다. 카스트제를 유지하고, 분리선거를 인정하지 않은 국민회의의 마하트마 간디와 많은 충돌을 빚었다. ※출처 : 위키백과) 약 100년 전 사람인데 한 50년 전에 돌아가셨을 거예요. 이분들이나 또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이라든지 몇 개 단체가 인도 땅에 들어가 가지고 인도불교 부흥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도 국민을 10억 명으로 보면 힌두교도를 약 8억으로 잡습니다. 인도의 불교 신도수가 약300만명으로 보면 전체 인구의 0.3%정도입니다. 지금 그렇게 불교신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 0.3%, 이게 거품이어요. 지금 인도의 저 불교신도, 거품입니다. 왜냐? -지금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저 무아설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어요. 이게 불교인줄 알아요.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몰라. 보살, 붓다의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또 당연히도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칭명염불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어요. 이건 껍데기 불교인 거예요. 이 껍데기 불교 갖고는 앞으로 희망을 걸어서는 안 돼. 희망이 없는 거예요. 장래가 없어요.
'암베드까르'라는 그분은요 이 영혼, 윤회, 지옥, 천상 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부정합니다. 자, 이런 신도가 1,000만인들 1억인들 필요가 있습니까? 힌두교한테는 안 되는 거예요. 제압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한 칼에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 영산불교와 같은 부처님의 정법을 선양하는 교단이, 여러분들과 같은 바른 안목을 가진 신심있는 신도들이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가 부파불교 당시에 인도 땅에서 있었더라면 1000년도 2000년도 전에 세계화 되었을 겁니다 여러분.
본체의 진리는 삼법인(三法印) 혹은 사법인(四法印)에서 말하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어요. 본체계의 진리는 열반적정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적정(寂靜), 아주 많이 수행을 해서 염불하면서 고요하게 고요하게 침잠해 들어가고 들어가면 아주~ 적정상태로 쑥 빠질 수 있어요. 그런 경지가 말하자면 화두타파의 경지쯤 되는데, 거기서 더 들어가요. 더 들어가고 더 들어가면, 더 들어가면 더 들어 갈수록 안온하고 평온하고 행복하고 그런 느낌이 들어요. 더 들어가면 더 들어갈수록 기쁘고 즐겁고 환희스러워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이걸 알아야 되요. 그게 열반적정이라는 것입니다.
《잡아함경》에요,《아함경》알지요? 4아함이 있지요.《잡아함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업의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有業報而無作者) 업의 과보는 있지만, 유업보(有業報), 그렇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이무작자(而無作者). 아! 이런 불설(佛說)아닌 불설, 이런 구절이《잡아함경》에 들어가 있다고요. 무아론자들이 저거들 해석에 맞다고 이것을 잘 인용한다고요. 이거 큰일이라. 그런데 이게 불설(佛說)인줄 알지만, 불경(佛經)이 전부 불설인줄 알지만, 아닙니다. 아주 많이 왜곡된 것은《아미타경》을 비롯해서《정토삼부경》이고요,《법화경》같은 것도 없어야 할 장(章)이 하나 있어요. 우리가 꼭 걸러내야 되요. 지금 우리 영산불교가 할 일이 대단히 많은데, 지금은 시기상조이고 우리가 언제부터인가는 그 작업을 해야 되요. 불경이라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첫 장부터 끝까지 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어요. 이건 대단히 문제가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부처님 당시에는 연필도 없었고 종이도 없었고 녹음기도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부처님 말씀이 전해 내려갔느냐? 외워가지고 내려갔다고요. 그걸 합송이라고 해. 모두 합송해. 외웠단 말입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어디에 가셔서 무슨 주제로 이런 말씀하셨다’ 해가지고 쭈~욱 총명하게 다 외워내면 1,200비구들이 따라서 외워요. 이렇게 합송으로 내려간 거예요. 100년 200년 수 백년을 이렇게 내려가다가 문자로 정착된 거예요. 그러니 이 경전을 100% 신뢰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이건 부처님 말씀이다’ 하는 것을 가려낼 줄 아는 선지식이 있어야 되요. 그건 불과를 증한 분만이 가능해요. 그래서 앞으로 정말로 이 큰 불사를 할 수 있을런지... 해야 되겠지만, 이게 숙제입니다.
지금 무아(無我)라고 해가지고 자아도 없고 영혼도 없고 그럽니다. 자아도 없고 영혼도 없다고 해버려. 자아라는 것은 앞에서 내가 말씀드린 생각 ․ 행위의 당체입니다. 지금 불교가 자아도 없고 영혼체도 없다고 해. 그러니 이거 힌두교하고는 정반대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atman)을 이야기하는데요. 본체가 있어야 윤회한다고 하는데. 그 말은 맞는 거예요. 본체가 있어야 윤회하는 거예요. 본체가 없으면 한번 났다가 죽어버리면 끝나버리는 거예요. 파리나 모기 같은 것, 이것들이 그럽니다. 이건 한번 났다가 죽어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그것은 본체가 없어요. 영적인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그렇잖습니까? 났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이거 잘 알아야 되요. 끝나는 것이 아니어요.
여러분이 한평생 착하게 살았느냐 혹은 나쁜 짓하고 살았느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죽은 후에 49일간의 논죄 기간이 있어요. 그 논죄기간 동안 논죄를 받아가지고 다음 생이 정해지는 거예요. 그 업에 의해서 너는 지옥 중에서도 무간 지옥, 너는 중지옥, 하지옥, 너는 아귀, 너는 축생...,이렇게 정해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태어나는 거예요. ‘너는 다시 사람’ 그러면 다시 또 태어나는 거예요. ‘너는 구렁이’ 그러면 구렁이로 떨어지는 거예요. 들어가는 거예요. 또 그것이 죽으면, 또 본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1․2․3번 영체는 뭉쳐 다닌다고 했지요. 이놈이 또 와가지고 사람으로나 다른 짐승으로나 하늘로나 가는 것이에요. 1․2․3번 영체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러나 괴겁(壞劫)에서 공겁(空劫)으로 들어 갈 때 해체가 되요. 나(我)라고 하는 당체, 업은 업대로 해체가 됩니다. 다시 현상할 때 업이 따라 붙는 거예요.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이유 중에 또 하나 있어요. 뭐냐?
‣분파 분열을 막지 못한 점이어요.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어가신지 100년 만에 두 갈래로 분파가 되었다고 했지요. 이것이 300년~400년 만에 20개 이상으로 쪼개져버린 거예요. 이 분파를 막지 못했어요. 저 천주교가 어떻게 지금 저렇게 하나로 강성하냐? 물론 기독교(개신교)가 떨어져 나갔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저 천주교는요 비교적 분파가 되지 않았어요. 기독교는 떨어져나가 가지고 저것들이 그냥 분파가 되어가지고 지금 한 2만개로 분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천주교 본류는, 성공회가 하나 떨어져나가고 동방정교가 떨어져나갔지요. 그렇지만 비교적 분파가 안 되었다고요. 앞으로 우리 영산불교는 부처님께서 엄명하십니다. “만약에 분파 분열을 책동하는 자는 상하를 가리지 않고 극무간지옥으로 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극무간지옥으로 들 것이다. 앞으로 우리 현지사는 천년 만년 갈 거예요. 전 세계를 석권해서 온 인류를 구제하려면 현지사와 같은 정법 교단, 정법의 사상이어야 되고, 분파 분열이 없어야 되고 그래. 화합해야 돼. 화합 교단으로 가야 돼.
그래서 여러분한테 지난 시간 또 그 지난 시간에 자꾸 스님이 말씀한 것이 있지요? 안이나 밖이나 똘똘 뭉치라고.
그런데 많은 보살님들이 스님의 법문을 아프게 알아들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하느냐? 새로 신도가 들어오면 이 신도가 저쪽 그룹에 가서 이야기하면 아니꼽게 보고, 이리 오면 저쪽에서 아니꼽게 보아 왕따시키고, 저쪽 패를 시기질투하고 미워하고, 지금 이런다고 그래. 이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두 사람을 못나오게 조치한 거예요. 지금 못 나오게 해버렸어. 100일 근신해라.
여러분! 스님이 간절히 당부합니다. 그러지 마시오. 시기질투 하지 마. 이 시기질투는요 아주 못된 거예요. 시기질투, 이게 없다면 물론 성자이지요. 우리가 성자의 가는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짐승이 안 되어요 여러분. 지옥 안가요. 여자분들은 시기질투가 좀 있어. 시기질투, 이건 진짜 못써. 이거 짐승 되는 길이어요. 이건 심하면 지옥가는 길이어요 여러분.
어떤 분의 천도재를 지낼 때에 부처님들이 작업하시는 것을 보니까, 여러 가지 작업을 하셔요. 이 혀를 통해서 뱃속의 것을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고, 목을 쳐서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아! 저 사람은 다음 생에 뭣이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렁이가 나오기도 하고, 소가 나오기도 하고, 쥐가 나오기도 하고, 많이 그래요. 그것은 대부분 그 짐승들을 살생해서 그런 거거든. 자, 식(識)이 윤회의 주체라면 그 구렁이, 그 쥐가 수 백 마리가 나오는데, 수 백 번 쥐가 된다 그거예요. 살생의 과보를 그렇게 받는다는 거예요.
지금 이 업장이 식의 어디에 보존 됩니까? 식(識)이 윤회의 주체라면? 아뢰야식?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다? 아트만(atman), 영혼체를 못 보니까 학문적으로 궁리를 해서 참 기가 막힌 이론이다고 내놓은 것이 그 모양이었어. 물론 유식에서 내놓은 아뢰야식이론이 무아와 윤회문제를 봉합하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여러분! 분파 분열을 막지 못한 점이 불교가 망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요.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승려들의 부패를 들 수 있습니다. 부패. 지금도 엉망이어요. 우리나라의 다른 종단을 보면 한심한 지경입니다.그 당시도 그랬어요. 많은 뜻있는 독지가들이 많은 후원을 했어요. 후원을 하다가 보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거든요. 이 중들이 학문만 하고 수행을 하지 않다가 보니까 중생심이 발동해가지고 욕심이 생깁니다.
욕심이 생기면 어떻게 되지요? 특히 젊은 승려들이 욕심이 생기면? 몰래 음행을 하는 등 계율이 문란해지고 승단의 기강이 무너지고...많이 썩었다고요. 부패, 승려들의 부패를 들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승려들이나 우리 신도분들은 청정계율을 지켜라. 우리 스님들은 오계십선은 물론이고 삼취정계를 지켜야 되요. 아주 무서워요.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정말로 무섭게 다루어요. 여러분도 오계십선을 지켜야 되요. 그러면서 보살행을 해야 되요. 계율을 지켜야 되요.
출처/ 현지사 자재 만현 큰스님 춘천 법문중 발췌 2011.9.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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